2017. 10. 30-11.3
소다 옹이 1867년 10월에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같은 해 12월에 미국에서는 레이놀즈 선교사가 태어났습니다. 레이놀즈는 햄펀시드니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남장로교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어 라틴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희랍어 등 성서 원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얻은 원어 실력으로 우리 나라 성서번역(특히 구약성서)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대학 시절 만난 부인 팻시 볼링은 버지니아 주 개척자 가문의 출신으로(1868년생) 교사였고, 음악 애호가이며 선교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이 두 분은 1893년 한국으로 선교오기 약 6개월 전 결혼하였습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경위는 1891년 안식년 차 미국에 잠시 귀국한 언더우드의 보고 연설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즉, 1891년 10월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외지선교 신학교연맹 대회가 열렸고, 언더우드는 보고연설을, 당시 밴더빌트 대학에 재학 중이던 윤치호는 조선에 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조선 선교에의 초청에 레이놀즈, 데이트, 전킨에게 큰 감화를 주었고 3분은 조선 선교를 위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행16:10).
언더우드의 보고 연설을 레이놀즈와 함께 들었던 테이트는 조선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남장로교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를 찾아가 청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원회로부터 “그런 미개한 나라에는 파송할 만한 인적 물적 자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직 거기에 대한 계획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절 회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남장로교회와 외지선교부 실행위원들을 설득하려고 계획하고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먼저 언더우드로 하여금 남장로교 각 교회, 신학교, 노회 등에 조선의 사정과 선교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고 <선교사>와 같은 잡지에 기고했습니다: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지금 조선의 왕은 기독교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다. 그곳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완강하게 반대할 만한 기성 종교가 없다. 이미 선교사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 사람들만으로는 급속한 성장 추세에 있는 현 선교 실적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리고 레이놀즈와 전킨은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을 쏟아 선교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끈질기에 간구했습니다. 이들이 기도회를 시작한 지 2달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외지선교부 실행위원회로부터 “8월에 떠날 준비를 하라”는 반가운 전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실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11:12).
남장로교외지선교부로부터 계획조차 없다면서 조선선교 요청을 거부당한 뒤, 레이놀즈와 전킨은 조선선교의 길을 열어주시도록 합심기도를 하였고 약 2달이 지나는 동안 하나님은 사태를 변화시켰습니다. 먼저 그리스에 파송했던 선교사들이 그나라 정부의 방해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하나는 언더우드의 친형이며 북장로교전도부의 위원이던 존 언더우드가 남장로교전도부가 자금난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지 못한다는 말에 2천달러를 남장로교에 헌금했고, 동생 언더우드도 역시 개인적으로 5백달러를 헌금하여 선교비조로 3천 달러가 확보되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외지선교부는 긴급회의를 열어 레이놀즈, 테이트, 전킨 등 세 명을 초대 선교사로 선정, 피송할 것을 결의한 뒤 공식 발표하였습니다. 이들과 함께 이들의 부인과 여동생 등 4명이 가담하여 이른바 “7인의 선발대”가 결성되었습니다. 이들은 거의 다 장로들의 자녀들로서 철저한 개척 선교 정신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레이놀즈 일행은 1892년 11월 4일 제물포에 상륙하였고, 이듬해 장로교선교사공의회의 선교구획 결정에 따라 전라도와 충청도 지방을 배정받아 남장로교선교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전주 성문 밖 언덕 위 은송리 마을에 아담한 초가집 한 채를 사들여 선교본부를 차렸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5:16).
레이놀즈 선교사의 업적으로 가장 크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글성서번역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남달리 어학에 소질이 있었고 학자풍의 선교사였으므로 어학 선생도 학자풍의 사람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어학 선생으로 맞이하게 된 분이 추강 김필수였습니다. 김필수는 1872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부유한 연안 김씨 가문의 독자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과거에 응시코자 상경했다가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의 총애를 받은 관계로 부득이 그와 함께 일본 고베로 망명을 가서 10년 동안 일본에 있었습니다. 그 사이 그는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귀국하자 곧 레이놀즈의 어학 선생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 후 레이놀즈와 함께 성서 번역에 참가하면서 확실히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90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가 되고 1915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수교장로회총회장이 되었습니다. 레이놀즈가 누구보다도 빨리 우리말 문장 실력을 익힐 수 있게 된 이면에는 학자 출신 김필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번역을 위해 각 교파 선교사들은 1893년 상임실행성서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레리놀즈는 게일과 함께 5명의 전임번역위원회 중 한 사람으로 추가되어 항상 서울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그때마다 김필수와 동행하였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잠27:17-18).
레이놀즈 선교사는 상임실행성서위원회의 대변자의 책임을 지고 성서번역에 관련한 많은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1900년 신약성서의 번역을 종결짓고 1910년까지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는 히브리어에 능통한 그가 거의 독보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심지어 1937년 은퇴하여 한국을 떠나기 직전까지 신구약 성경의 개정판을 내는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한편, 그의 인간상은 역시 그의 학자다운 풍모와 독실한 신앙경력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학자다운 사람은 신앙 면에 조금 부실하거나 지도력이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의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어학 실력을 교회 발전에 십분 활용했습니다. 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어학을 통해 선교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양화진에 묻힌 사람은 레이놀즈가 아니라 그의 두 아들입니다. 첫째 데이비스는 1893년 한국에 태어났으나 그 해에 죽어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둘째 아들 존 볼링은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시립대학 수리학과 교수를 역임하고1970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작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가문의 너무나도 완고한 신앙 전통에 오히려 회의를 느낀 사람이었으나 한국을 무척 사랑했기에 미국은 제2의 고향, 한국은 제1의 고향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인이 유언을 받아 유골을 화장하여 그 재를 소포로 한국에 묻어 달라고 보내왔고 보이스사 권명달 사장이 양화진에 안장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