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읽기

10/23~27

중일 전쟁이 한창인 때, 하루는 아침 일찍이 일본 헌병대로부터 출두 명령을 받았습니다. 소다 옹은 깜짝 놀라 헌병대에 갔더니 다짜고짜 죄상을 추구했습니다. “영감이 한국 고아들을 데려다가 항일 교육을 시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소, 영감이 보육원 출신 중에서 불령선인(일본의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이 나왔단 말이야! 이것은 영감 책임만으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헌병대가 체포하여 불령선인으로 몰아치는 한국 청년은 가마쿠라 보육원 출신이 분명했으며, 보육원을 나온 뒤 평양의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애국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성장하여 독립운동 지하조직의 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소다 옹은 그 사실을 알고 놀라 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절도범이나 살인범이 아니고 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다가 잡힌 애국 투사임을 알고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소다 옹은 그런 내색없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자기의 불찰이니 용서하고 그 청년을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한편, 소다 옹은 원산 감리교회를 목회하러 원산에 가서 8.15 해방을 맞이했고 진군한 소련군을 피해 교회로 도망온 일본인 교인들을 숨겨두고 교회 현관을 지킴으로 소련군을 막아 이들을 보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선한 목자로 어려움에 처한 주님의 양떼를 헌신적으로 돌보았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요10: 11-12).

소다 옹은 보육원을 운영할 때 경제난으로 폐원될 위기에 봉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직원 한 명이 보육원 현관에서 큼직한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다면서 들고 왔습니다. 무엇인가 하고 펼쳐 보았더니 훌륭한 옷가지와 시계 등과 함께 현금 천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편지도 한 장이 끼워 있었는데, 펼쳐보니 “소다 선생 내외분이 하시는 일은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인 줄 압니다. 우리나라 동포를 대신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사정이 있어서 국외로 망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도둑놈은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부디 이 물건을 받으시고 불쌍한 고아들을 위해 써 주세요”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그 편지를 받고 소다 옹 내외는 꿈인지 생시인지 놀라며 하나님께 감격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보따리 덕분에 고아원은 문을 닫지 않고 계속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고아원 원장과 교회 전도사 두 가지 일을 병행하던 소다 옹은 원산감리교회에 목사가 없는 것을 걱정하면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3년 가을 원산교회에 무보수 전도사로 취임하였습니다. 부인은 서울에 남아 가마쿠라 보육원을 운영했기 때문에 77세의 소다 옹은 자취를 하며 목회를 하였습니다. 1945년 8.15일 해방을 맞이하여 피신해 온 일본교인들을 돌보는 등 주님을 섬기다가 1947년 5월에 이르러 원산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일본인 틈에 끼어 서울에 왔습니다. 소다 옹은 한국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한국에 눌러앉을 수도 있었지만 불타는 조국애와 전도열로 인해 부인과 떨어져서 일본으로 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1947년 10월 소다 옹은 “하나님과 주님의 은혜 어찌 다 갚으리요. 세월만 허송하여 백발이 성성한데 사나이의 일편장상 아직도 남아 있거늘 어찌하여 나는 동쪽나라(일본)로 여행을 가야 하는가!” 라는 시 한 수를 남겨 두고 부인 다끼와와 천당에서 만날 것을 서약한 뒤 작별하였습니다. 그때 소다 옹의 나이 81세였으며 부인은 67세였습니다. 소다 옹은 걸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서 미군 배를 얻어 타고 일본 땅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습니다. 그후 제2차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조국의 회개를 부르짖으며 세계평화를 위한 전국 순회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한 손에는 ‘세계평화’ 라는 표어를 들고, 다른 손에는 성경책을 든 채로 도보로 전 일본을 순회하였습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사2:4)

소다 옹이 조국의 회개를 외치면서 일본 전국을 돌자 신문기자들 왔습니다. 소다 옹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신조는 빌립보서 1장29절이다. 즉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라는 말씀이다. 지금 한국인들은 광복의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일.한 친선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로 믿는다. 경성(서울)은 쌀7작, 외미1홉3작, 그 밖의 분유의 배급이 보장되어 온 거리가 활기를 띠고 있다. 경성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이 7-8백 명이나 있다. 나는 이승만씨와 만났을 때 재일 한국인 60만에 관하여 일본인들이 조금 더 올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장차 한국인들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 그 뒤 소다 옹은 원자탄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비롯하여 멀리 규수로부터 홋카이도에 이르기까지 도보로 순방하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1월14일 다끼 부인이 별세했다는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부인은 74세, 소다 옹은 85세였고 부인의 부음을 듣자 그는 슬퍼하기는커녕 도리어 찬송과 감사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고 부인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시켜 돌보아 준 김명선 박사등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부인 우에노 다끼 여사의 장례는 한국사회사업연합회장으로 엄숙히 거행되었습니다.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12:3).

소다 옹은1961년 3월 가마쿠라 보육원의 후신인 영락보린원의 원장 한경직 목사의 초청장과 재정보증을 받고 일본 아사히 신문사의 특별기를 타고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소다 옹은 영락보린원으로 갔습니다. 가마쿠라 보육원을 떠난지 14년 만이나 이듬해 1962년 3월 28일 96세의 나이로 하나님 나라에 가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습니다. 소다 옹의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시민회관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되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습니다. 주요한 선생이 쓴 묘비 앞면의 글입니다.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출생하다. 1913년 서울에서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매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 수천이더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속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역설하다……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96세라… 1950년 1월 부인 다끼 여사도 서울에서 장서하다.” 그리고 주요한 선생의 묘비 옆면 시입니다. “언손 품어주고 쓰린 마음 만져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소다 옹이 서거하자 일본에서도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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