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6 – 20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 무조건 일본이라면 적대시하던 일제 시대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받던 일본인 한 사람이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이름은 소다 가이찌입니다. 소다 옹은 1905년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 40년간, 그리고 1961년부터 1962년까지 1년간 모두 합해서 41년간 한국 땅에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그는 오로지 한국 고아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소다 가이찌는 1867년 10월 일본 야마구치 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훗날 한시를 잘 지은 것을 보면 한학을 본격적으로 배운 듯합니다. 21세부터 고향을 떠나 방랑생활을 했고, 고학을 해서 초등학교교원도 한 경험이 있습니다. 1893년 25세 때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이 되어 홍콩으로 갔으며 거기서 영어를 열심히 배웠고, 1896년 28세 때에는 대만으로 가서 독일 사람이 경영하는 공장의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하면서 독일어를 공부하여 독일어 서적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방랑생활을 하다가 1899년 노상에서 술 취하여 쓰러져 의식을 잃고 거의 죽게 되었으나 아무도 그를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어떤 한국인이 한 명 지나가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를 해 주고 밥값도 대신 치러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소다는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 후 6년이 지나 그는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에 가서 은혜를 보답하리라 결심했기 때문이었으니 1905년 6월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땅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여 복음전도자까지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 22:37-40)
1905년 6월 한국에 도착한 그는 우선 서울에 정착하여 오늘 날 서울 YMCA 전신인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에 일본어선생으로 취직했습니다 당시는 러일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YMCA에 일본어 선생이 한 명 필요하던 터였습니다. 때마침 독립협회 사건으로 다년간 수감되었던 이상재 이승만 김정식 등 애국지사들이 풀려나와 YMCA 운동회 가담하게 되었으며 지방으로 좌천 되었던 윤지호, 미국으로 유학 갔던 김규식 등도 YMCA에 모여들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평안 북도 평양을 거쳐 전국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1905년 을사조약 때문에 한국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정신적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큰 변화를 체험한 소다는 1906년 기독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풀려 나온 월남 이상재 선생에게 큰 감화를 받고 일평생 월남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큰 동기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우에노쿠라는 여성을 알게 되어 1908년 그녀와 결혼한데 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우네노와의 만남으로 소다는 새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한 명의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까지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눅 13:20-21)
우에노 다끼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 때 일본나가사키에 있는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한국에 와서 히노데 소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숙명여학교와 이화 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지냈던 여성입니다. 소다는 우에노 다끼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새 사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그는 지독한 음주 벽을 완전히 청산하고 금주회 회장까지 되었습니다. 소다는 입버릇처럼 “나는 젊을 때 대주가였으며 혈기왕성 하여 난폭한 짓을 많이 하는 불량배였다”라고 했는데 사실 그는 술 때문에 여러 번 죽을 뻔 했고 우리나라에 오게 된 동기도 따지고 보면 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1908년 결혼하고(각각 41세, 30세의 노총각 노처녀였음), YMCA 일본어 교사로 있는 동안 기독교 집회에 자주 참석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 YMCA는 국내의 명사를 초청해 강연회, 토론회, 성경 사경회, 부흥회등을 자주 열었고, 특히 YMCA의 종교부 총무로 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은 ‘백만명 구령 운동’의 일환으로 ‘동포여 경성하라’라는 전단을 뿌리면서 전도운동을 했으며 소다는 이 운동에도 직접 가담하였습니다. 마침내 소다는 YMCA 학관 1호 선생을 그만두고 일본인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매서인도 겸하면서 복음 전도에 투신하게 되었는데 이후 96세로 한국 땅에서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전도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과 고아를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소다 옹의 신조는 빌립보서 1:29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소다가 일본인 경성감리교회의 전도사로 활약하던 1910년대는 우리 민족에게는 실로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데라우치 총독의 무단정치가 지배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 중에 소다는 여러가지 파란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초심자의 열심과 양심으로 살았지만 박해도 많이 받고 오해와 멸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유명한 105인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소다는 일본의 만행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동분서주 하면서 이들의 석방 운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그는 1919년 삼일 운동 때에도 맹렬히 석방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당시 33인 민족대표 중에는 YMCA 지도자들이 9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다가 대스승으로 존경하는 이상재 선생 역시 투옥된 것에 분노하였기 대문입니다. 그래서 소다는 당시 대법원장으로 있던 와다나베를 찾아가 석방을 호소했으며 한편으로는 일제의 불의와 만행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소다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감사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들은 도리어 ‘간사한 놈’ ‘일본의 스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