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나눔

2017.10.9-13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1904년 곤당골 교회가 인사동 승동교회로 옮겨 갈 때까지 줄곧 이 교회를 섬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도 구역은 멀리 황해도 배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무어 와 그의 한국인 동역자들은 한강 유역에서 전도를 계속했다 어떤 때는 기쁜소식이란 이름의 자가용 배 한 척을 타고 다니며 전도를 하기도 했다”라고 로데스는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전도시작 후 3년 안에 25개 처에 신자가 생겼고 그중 황해도 배천에는 신자들이 자력으로 큰 기와집을 사서 훌륭한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박해를 많이 받았지만 교인 수는 날로 왕성하여 850명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무어는 평양에 있던 장로교 신학교의 교수였습니다. 그는 1학년 학생들에게는 창세기를 2학년 학생들에게는 민수기와 열왕기를 3학년 학생들에게는 영국 역사를 가르쳤습니다. 무어는 영국 의회 정치제도를 강의하면서 한국 학생들에게 자유 사상을 고취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에게 자유 사상을 고취하도록 했으며 해마다 이런 강의를 계속 하면 장차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 때문에 그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따돌림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몹시 고독했습니다. 아울러 한국인 양반들에게서도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종의 모습으로 묵묵히, 그리고 뚜벅뚜벅 자기의 사명을 위해 걸어갔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사람들을 섬기다가 결국 장티푸스에 걸려 1906년12월22일 제중원에서 주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향년 48세였습니다. 비문에 기록된대로 그는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충복”이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6-7).

오늘부터는 민족운동의 동역자 DA 벙커 선교사와 그의 부인 의사 엘러즈에 대하여 쓰겠습니다. 역사가 이능화는 “조선 기독교급 외교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3년간의 감옥 생활 중 고독하고 울적한 마음 이를 데가 없었는데 다행하게도 새로운 법이 생겨서 감옥 안에서도 종교서적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서양 사람들이 감옥 안에 들어와서 전도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때 마침 A.D. 벙커가 감옥 안에 들어와 전도를 했다. 이에 옥중에 있는 여러 사람이 서양의 경서를 서로 읽고 연구하여 신자가 되기를 결심했다. 이것이 곧 우리나라 역사상 고관 출신의 양반과 선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최초의 역사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재 등 전직 고관들과 지성인들이 벙커의 전도로 예수교 신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벙커는 1853년 미국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뒤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벙커는 조선의 요청에 의해 미국 국무성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초빙교사로 발탁한 3명(헐버트, 길모어)의 선생 중 한 명이었으며, 1886년 7월 4일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벙커에게 조선의 첫 인상은 매우 낯설고 신기 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기후와 생활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벙커는 9년간 영어교사로 지내다가 육영공원이 폐지된 이후 감리교선교국 요청에 따라 배재학당 교사와 학감 후에는 교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종래의 암기식 주입식 교육방법을 폐지하고 공개식 고시 방법으로 새 교육을 실시하면서, 고대사, 물리학, 화학, 수학, 정치학 등 새 교육 과정을 많이 채용하여 교육혁신을 가져왔고 많은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2:15).

벙커는1887년에 애니 엘러즈와 결혼하였습니다. 엘러즈는 1886년에 광혜원 의사로 오게 되었는데 얼마 뒤 명성황후가 자신의 시의로 채용하였습니다. 그런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그녀는 시의가 되기 전부터 광혜원 원장인 동시에 고종의 시의로 있던 알렌을 따라 가끔 궁중에 들어갔습니다. 1886년 가을 엘러즈가 입국한지는 불과 몇 달 안 되었을 때 였습니다 하루는 대궐에서 황후께서 탈이 났으니 약을 지어 보내라는 기별이 와서, 알렌은 증세를 묻고 짐작해서 약을 지어 보냈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다른 약을 지어 보내라는 기별이 와서 병세를 들은 뒤에 다른 약을 지어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며칠 후 내시가 와서 “약효가 전혀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느냐?” 하고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알렌은 용기를 내어 “직접 진찰 하기 전에는 약효를 낼 수가 없은즉, 신 대신 여의사를 들여보냄을 허락하옵소서” 하면서 엘러즈를 소개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알렌은 고종황제를 직접 진찰하고 치료 한 적은 있으나 황후 민씨의 가슴에다 청진기를 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엘러즈는 궁중에 들어가 황후 민 씨를 처음으로 진찰하게 되었고 이어 시의가 되었습니다. 이후 10년이 지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뒤에 발표된 그녀의 진찰기를 읽어보면 “황후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더욱 황후께서 웃으실 적에는 절세미인이었다. 능숙한 외교 수완과 예리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부드럽고 다정한 인간미가 있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그녀는 민비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으며, 고종 황제의 신변 보호를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22:29).

벙커 부부는 파란 많은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살아온 선교사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1894 – 1895년의 동학 혁명,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등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운 한민족의 고난상을 목격해 왔습니다. 그리고 1896년의 독립협회운동, 독립문 건립, 순 한글로 된 독립신문 창간 등 근대식 민권 운동도 직접 목격했습니다. 아니 단순 목격자가 아니라 그 민권운동의 동역자이며 후원자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운동의 주역을 맡았던 서재필 윤치호 등은 모두 벙커와 동지였고 배재학당의 강사들이었으며, 그 학당 학생들의 지도자들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제자들인 이승만, 양흥묵, 신흥우 등이 학생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독립협회는 강제로 해산되는 동시에 그 주동인물인 이상재 홍정우 남궁억 정교 등의 지도자들 역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한성감옥서는 그의 친지들로 만원이 되었습니다. 벙커는 감옥안의 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동료 선교사들과 같이 힘을 합하여 정부당국에 죄수들의 처우개선, 고문 제도 폐지, 빈번히 음식이나 의복을 차입 할 수 있는 자유, 독서의 자유 등을 건의했습니다. 누구보다도 벙커는 가장 열성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이를 계속 추진했으며,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 감옥에 무상 출입하면서 차입도 하고 위로도 하고 예배도 드려 주었습니다. 그 결과 이상재 이원근 김정식 유성준 안국선 등이 감옥안에서 예수를 믿게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고관 출신의 양반과 선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된 최초의 역사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25:34-36).

벙커가 배재학당의 교장으로 취임한지 1912년 신흥우에게 교장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6년간 열정을 다해 봉직했습니다. 이 6년간은 한국이 완전히 국권을 빼앗기는 기간으로서 학교운영이 가장 곤란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벙커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많은 인재를 길러냈습니다. 그 뒤 벙커는 감리교 선교국 소속 선교사로서 말년을 조용히 전도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26년 7월 4일 75세의 노령으로 은퇴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30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으나 1932 년 11월 26일 80세 때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시에서 별세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나의 유골이나마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부인이 남편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1933년 4월 8일 정동 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양화진 외인 묘지에 모셨습니다. 그 뒤 부인이 세상을 떠나 합장 하였는데 벙커 부부가 합장된 묘비에는 “날이 새고 흑암이 물러 갈 때까지”라는 의미심장한 묘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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