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7.9.18 – 22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 대통령에게 헐버트를 보내 친서를 전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미국과 밀약(1905.7)을 맺어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를 보장받고 있었기에 친서 전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헐버트는 “전환기의 한국”이라는 그의 수기에서 비통한 어조로 미국 정부의 불의를 규탄하였습니다. 이어 1907년 헐버트는 이준등 헤이그 밀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고자 가족과 함께 한국을 출발하여 일부러 일본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그 결과 이준등 3인의 밀사는 성공적으로 헤이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밀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한국에서 추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1948년 정부 수립시 이승만 대통령이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대하여 한국을 방문한 헐버트는 그만 고령의 나이( 84세) 때문에 한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헐버트는 명문 기독교 가정의 후예로서 그의 아버지는 회중교회 목사, 미들버리 대학 학장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다트마운트 대학 창설자의 후예로서 인도에 파견되었던 선교사의 딸이었습니다. 헐버트의 가족은 철저한 칼빈 교리의 신봉자였습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할 것은 헐버트 박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연구의 개척자로서 “한국사”, “한국망국사”의 저서 두 권을 남겼으며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소리글자”라고 극찬하신 분이었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편 84:10-12)

양화진 외인 묘지에 묻힌 분으로 베델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영국인으로 기자였고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의 창설자이자 초대 사장을 지냈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 규탄하는 동시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 황제의 친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여 일본의 침략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장본인입니다. 그는 1872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출생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 때 런던 “데일리 뉴스”지의 특파원으로 내한하였습니다. 그러나 내한한지 4개월도 안되어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지사들과 만나 1904년6월29일 “대한매일신보”의 영자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크게 분개하여 일본의 만행을 대내외에 규탄함으로써 그가 사장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는 대표적인 민족의 대변지로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1908년 4월17일자에는 미국에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전명운과 장인협의 거사를 찬양 보도하자 일본의 거센 항의로 서울 주재 영국영사관 고등부는 베델을 상하이로 추방하여 3주간의 금고형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베델은 형을 치룬 뒤 다시 서울에 왔으나 오랜 일제의 탄압과 경영난에 멍든 몸을 가누지 못하여 병상에 눕게 되었고 1909년 5월 1일 37살의 아까운 나이로 서대문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그는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5월 2일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는 진실로 강도맞은 한국인을 도운 영국출신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10:36-37)

오늘부터는 백장(정)들과 같은 가난하고 낮은 자들의 친구인 선교사 사무엘 무어(한국 이름 : 모삼열)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무어 선교사의 출생지는 알려진 바 없으나 1846년에 태어났고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뒤 46세 때인 1892년 부인 로즈 앨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습니다가1906년 12월 22일 장티푸스에 걸려 제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불과 14년의 짧은 선교활동이었지만 그의 선교 공헌은 그야말로 혁혁한 것으로, 그를 연구한 마르다 헌틀리는 “세계를 뒤집어 놓은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행전을 썼으며, 무어가 이룩한 한국의 백장해방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가운데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을 얻은 흑인들의 기쁨은 결코 한국 백장들의 그것보다 더 큰 것은 아니었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무어는 1892년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한 즉시 한국말 공부에 열중하여 심지어 우리말을 익히기 위해 자기 집에서 십여리나 떨어진 조그만 집에서 살았을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6개월 안에 우리말로 대화를 하고 교회에서 기도를 할 수 있을 만큼 어학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그리고 특기할 점은 무어 선교사는 우리나라에 도착한 지 수주일 안에 자기 집 가정부를 신자가 되게 할 정도로 전도에 뛰어났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2,30명의 사람들과 만나 교제하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고 매일 오후에는 서울 거리, 한강 어귀의 시골 마을에 자가 전도를 함으로써 1900년까지 25개의 예배 처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22:8-10).

1893년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습니다. 처음으로 선교사공의회를 조직하였고 순 한글을 사용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한편 장로교회로서는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에 이어 두 번째 교회가 설립된 해로서 이 교회는 바로 무어가 세운 ‘곤당골교회(곤당골은 고운담골의 약칭임)’이며 그 뒤 승동교회로 발전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헌틀리 여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에비슨 박사가 국립병원을 다시 연 뒤 무어와 그의 선생은 거기서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였다. 1893년, 즉 그가 내한한 지 2년째 되던 해에 신자들을 모아 서울에서는 두 번째 장로교회를 창설했는데, 창설교인은 16명이었고 첫 해에 43명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켰다.” 이런 무어 선교사의 영혼 구령의 뜨거운 열정으로 1900년까지 그가 전도한 교인 중 성인들의 총수는 850명에 달했고 어느 해인가는 그 중 100명에게 세례(장로교회는 침례가 아니라 세례의식을 베품)를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서울 서쪽 변두리에 두 개의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06년 북장로교선교회 본부의 통계를 보면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1906년 북장로교선교회 본부의 선교 실적 중 무어가 세운 집회장소 수는 총 집회장소 수의 거의 17%를 차지하였고, 그가 세례를 준 수는 총 세례교인의 13% 이상, 총 교인 수는 10% 이상이었고, 헌금 총액도 거의 1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어의 선교여정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마16:18-19).

백장은 제일 밑바닥 계급으로 일반 천인들과도 구별되어 호적에 입적이 금지 되었고 인권이 완전히 박탈된 채 크고 작은 제사 때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생업을 삼게 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백장의 수가 7,538호에 33,712명이었습니다. 선교사 무어는 백장의 기원부터 파헤친 뒤 1890년대 백장의 생활상을 상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였습니다. 무어는 칠반천역의 제도는 조선 초기 재상 황희에 의하여 제정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 한글로 광대, 백장, 고리장, 무당, 기생, 갓밧치 등 명칭을 기록하고 하나씩 그 내용을 설명하였습니다. 더욱이 제사의 풍속을 소상히 기록했는데 70-80마리의 소나 돼지를 잡아 봄,여름,가을,겨울 한 번씩 드리는 대제와 연말에 한 번 드리는 특제가 있었고, 초하루 보름으로 한 달에 두 번씩 조상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한 달에 몇차례씩 종묘의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동대문과 남대문에 있는 관우장 묘에다가 제사를 드렸고, 1년에 두 번씩 공자 묘에 드리는 제사와 한울님에게 드리는 천제, 기우제등 수 많은 제사가 있었고 그 밖의 지방 관청에서도 백장들의 임무는 컸습니다. 그러나 백장에게는 아무런 보수도 없었고, 그 대신 면세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불쌍하고 천대받는 백장들에 대한 전도와 이에 따른 해방운동은 곤당골교회에 백장 박성춘이 1894년 출석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것을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참 내 제자이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1-32사역).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