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한 겨울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명성황후의 부름을 받은 시의 언더우드 부인 홀튼 여사는 궁으로 갔습니다.황후는 궁 안의 연못이 잘 얼었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와 스케이팅을 하며 재미있게 보내라고 제안 했습니다.홀튼 여사는 좋은 기회라 여겨 온 가족과 함께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고, 고종과 황후도 왕세자를 데리고 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홀튼 여사는 연못가 소나무에 크리스마스트리를 하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명성황후는 홀튼의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듣고 맛있는 약과와 귀한 선물을 한 아름 하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서너달 뒤인 1895년 봄 어느 날, 황후의 명을 받들어 영의정 김홍집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귀족 자제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해 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명성황후는 건축비조로 3만달러를, 1년 경상비로 2만-3만달러를 세워놓았다고 하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뜻밖의 제안에 기뻐하며 “이제는 귀족들에게 전도할 기회가 생겼구나’ 하면서 대번 건축설계와 건축비 예산을 세워 재가를 올렸으나 그때에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 당하는 을미사변이 터졌습니다. 만약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지 않았다면 귀족 학교가 설립되었을 것이며, 귀족 학교가 설립되었다면 왕실은 아마도 기독교화 되었을 것입니다. 황실 복음화는 이렇게 아쉽게도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상황에서 고종은 매우 위험한 지경에 있었습니다. 언제 음식에 독약을 풀어 넣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에 고종이 마음 놓고 식사 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들은 일제히 고종 옹위에 나섰습니다. 우선 고종은 선교사들이 갖다 주는 음식만 안심했기 때문에 선교사 부인들이 직접 식사를 지어 올렸습니다. 음식을 운반할 때에는 주석으로 만든 큰 돈궤 속에다 음식을 넣고 자물쇠로 잠근 다음, 열쇠는 언더우드 부부 내외가 고종에게 드려 직접 열도록 했고, 의사 에비슨은 고종이 드시기 전에 미리 독이 든 여부를 시식하였다고 합니다.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게일, 벙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은 7주 동안 하룻밤에 둘씩 번갈아 야경을 섰는데 밤중에 고종은 악몽을 꾸거나 공포증이 생기면 가끔 “양인 없느냐?” 하고 고함을 치곤 했습니다. 이때에 가장 지성을 다하여 임금을 모신 선교사는 역시 언더우드 부부 내외였습니다. 그만큼 고종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황후를 시해하도록 일본인들을 궁 안으로 끌어들인 간신배들, 고종의 친아버지인 대원군마저 서로 원수시하며 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도와 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했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 36-37).
1916년은 언더우드 가족사에 경사와 슬픔이 엇갈리는 해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연희전문학교의 창립 등 엄청난 고생 탓으로 건강을 잃어 휴양차 미국에 갔다가 1916년10월12일 돌아가셨습니다. 이 무렵 언더우드의 아들 원한경은 에델 밴 와고너(1888년생)라는 선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와고너는 1912년 선교부의 추천으로 재한국 외국인 학교 최초의 교사로 파송되어 와서 가르치다 1916년 임기가 마치자 한국을 떠났습니다. 물론 원한경과는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막상 와고너가 서울을 떠나자 자신의 감정을 깨닫게 된 원한경은“이제라도 따라가 잡자” 하여 부랴부랴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무작정 따라 갔고 다행히도 그녀를 만났습니다. 이에 원한경은 와고너에게 청혼하고 두 분은 12월6일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미망인이 된 어머니 홀튼 여사를 모시고 다시금 한국에 왔습니다. 그 후 홀튼 여사는 1921년10월28일 세상을 떠나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습니다. 원한경은 1925년 뉴욕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42년 강제추방되었다가 45년 10월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49년 연희대학 학생들로 구성된 공산당원들로부터 부인 와고너는 총에 맞아 양화진 외인묘지에 묻혔습니다. 원한경 박사 역시 1951년 2월20일 심장병 악화로 영면하여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지금 양화진에 있는 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에는 미국 고향에 묻혔던 언더우드 1세를 1999년 이장하고 맏손자 원일한의 무덤까지 모두 5명의 언더우드 가문의 묘지가 함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 4:7-8).
2004년 11월 26일 중앙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연세대와 세브란스병원 등을 설립하고 4대에 걸쳐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언더우드 가문의 4세 원한광(61.미국명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사진)박사가 26일 오전 부인 낸시 여사와 함께 한국을 떠났다. 원 박사는 이날 오전 11시 인천공항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도착한 뒤 원박사는 큰 아들이 사는 워싱턴 DC에 거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언더우드 1세가 한국에 1885년 4월 5일 인천의 제물포 항구에 내린지 119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한편 떠나기 6개월전 원한광 박사는 동아일보와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4대까지 내려오는 동안 1대는 연세대 설립자, 2대는 교장, 3대는 재단이사, 4대인 나는 그저 한 명의 교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발전하는데 가족은 계속해서 망해 왔다’는 농담도 있습니다. 이는 120년 동안 우리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으로 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있는 언더우드만이 연세대의 정신을 이끌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원한광 박사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아버지 원일한 박사(1917년생)였습니다. 할아버지 원한경 박사(1890년생)와 마찬가지고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땅에 묻혔으며 “내 비록 미국인이지만 내 몸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신 것에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원한광 박사의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아주 검소하게 사셨고 원한광 박사의 옷은 항상 수선한 자국투성이었다고 합니다. 이 가문은 4대 120년 동안 철저하게 한국을 섬기고 목표를 달성하자 미련없이 떠남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음을 우리는 배워야만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오늘부터는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이자 최초의 교육가, 성서번역가, 편집인, 여행가, 위대한 목회자인 헨리 G. 아펜젤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분은 부인과 함께 1885년 우리나라에 와서 1902년에 목포 앞바다에서 물에 빠진 한국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돌아가시기까지 17년간 우리 민족에게 끼친 은혜는 막대합니다. 그는 비록 양화진에 묻히지 못했지만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묻혀있습니다. 아펜젤러는 1858년2월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서더튼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래 그의 선조는 독일계 루터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1882년 아펜젤러는 미국 독일계 루터교회의 교육기관인 플랭클린애드마샬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다시 드루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기도 전에 그는 감리교회외국선교부에 조선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하였습니다. 원래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는데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의 체결의 소식을 듣고 선교지를 전환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1884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선교부로부터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때는 그가 엘라 닷지와 결혼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된 때입니다. 그리고 1885년 1월 드루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펜젤러는 결혼과 동시에 즉시 조선을 향해 떠났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행 배를 기다리면서 2월2일 파울러 감독에게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펜젤러 부부는 아라빅 호에 몸을 싣고 태평양 항해에 올랐습니다. 이때 동행자가 있었는데 의사인 스크랜턴 부부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함께 아라빅 호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 조선선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사도 바울)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 26: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