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21 – 25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에는 직접 전도하기보다는 병원사업, 고아 사업, 교육 사업에 치중하다가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세웠는데,이것이 곧 새문안교회입니다. 입국한 지 3년째 되던 1887년 9월27일에 14명의 교인들이 언더우드의 집 사랑방에 모여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장로를 세워 당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언더우드는 노도사라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사람은 국내 최초의 세례교인으로, 헤론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다가 성경책을 훔쳐 갔던 사람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언론인과 편집자 역할까지 하였습니다. 한국성교서회(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를 조직할 때에도 언더우드는 거액의 원조를 받아 왔고, 별세할 때까지 회장으로 지냈습니다. 또한 1897년에는 “그리스도신문”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였는데,이 신문이 우리 교계에 새로운 지식과 영적 양식을 제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당시 정부에서도 상당히 많은 부수를 사들여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역사에서도 선구자였습니다. 1893년 이전까지는 찬송가가 있더라도 몇 장씩 낱개로 돌아다니던 것을 언더우드는 혼자 150장을 번역하여 책으로 엮어 1893년 간행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언더우드는 힘을 다하여 복음의 씨를 한국에 심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37).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와서 이루고자 한 큰 목표 가운데 하나가 교육이었고 여기에도 씨를 심었습니다. 먼저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학교로 시작했던 학교는 오늘날 역사적인 경신중고등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경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있을 때부터 최고 학부를 세우고자 애썼습니다. 드디어 1915년부터 종로 YMCA 지하실에서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잡기 시작하였는데 동료 선교사들 중에도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조선총독부는 교육령에 의하여 교육을 하려면 강의도 일체 일본말로만 해야 한다고 정해 놓았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환갑이 다 된 노인의 몸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어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휴양차 미국에 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별세하였습니다. 때는 1916년 10월 12일로 언더우드의 나이 57세였고, 한국에 선교사로 온지 31년 만이었습니다. 친지들은 거액을 장만하여 한국 땅에 장사 지내라고 했으나 홀튼 부인은 그 돈을 장사비용으로 들이지 말고 한민족을 위해 쓰자고 요청하여 협성보통학교와 성경구락부를 세웠습니다. 전자는 일제 탄압으로 사라졌고, 후자는 해방 후 매각되어 새문안교회 교육관 건립비로 희사되었지만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우고자 애를 쓴 연희전문학교는 지금 연세대학교로 발전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의 발전에 큰 공헌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15:58).
언더우드의 부인 이름은 릴리어스 홀튼(Lillias S. Horton; 1851년생) 이고, 한국에는 1888년 봄에 왔습니다. 홀튼은 북장로교선교부가 광혜원에 제2대 부인과 과장으로 파송한 여의사입니다. 그 당시 조선의 사정은 비참하고도 한심하였습니다. 홀튼이 입국한지 한두 달 될 즈음 항간에는 외국 사람들이 조선 아이들의 눈알을 빼어다가 안경알을 만들고, 염통을 빼어다가 양약을 만들어 판다는 허무맹랑한 낭설이 유포되었습니다. 이 낭설로 선교사 특히 병원에서 환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는 의사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서양 의사들은 키가 크니까 저건 도깨비다, 눈알이 새파라니까 저건 귀신이다 하며 무서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을 양귀자 즉 양도깨비라 불렀습니다. 이 낭설은 결국 민중폭동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이른바 이것이 ‘아기 소동’입니다. 격분한 군중들이 몽둥이를 들고 “양인 잡아라” 하고 고함 치며 떼 지어다녔으며 서양 사람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오해받은 어느 대갓집 하인은 매 맞아 죽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때 외국인은 바깥출입을 얼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홀튼은 병원 근무를 중단할 수 없어 사인교 가마에 몸을 숨기고 병원을 출퇴근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가마꾼이 몰매를 맞고 오지 않자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 언더우드가 홀튼을 보호해 주기 위해 나섰습니다. 걸어다닐 때는 수행원으로, 말을 탈 때는 마부역할을 하며 자기도 위험하였지만 홀튼의 신변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이러던 중 이 처녀 총각이 연애를 하게 되었고 1888년 가을 정식으로 약혼을 그 다음해 3월 황후의 특별대우를 받으며 화촉을 밝혔습니다. 이 당시 홀튼은 명성황후 민비의 주치의였고 양 여인은 동갑내기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언더우드 가문은 4대를 거쳐 120년간 복음, 교육, 의료등으로 한국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막10:45).
서울에서 화촉을 밝힌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여행(언더우드는 조랑말을, 홀튼은 가마를 타고 마부 그리고 조수와 함께) 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신혼여행은 일반적인 신혼여행이 아니라 아주 위험한 오지탐험이자 선교 개척을 위한 시찰여행이었으며, 한국의 풍토와 풍속과 언어생활에 관한 연구여행이었습니다. 홀튼은 1903년 “상투쟁이들과 더불어 15년”이란 책을 1903년에, “언더우드 전기”를 1918년에 저술한 바 있는데 이 여행에 관하여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때는 1889년 3월 언더우드와 나는 결혼식을 올렸다 …..언더우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북쪽 국경지대까지 이미 두 차례나 여행을 한 경험이 있었다….우리는 캄캄한 밤중에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계곡을 통과했으며,강도 떼를 만나기도 했다. 우리는 그 강도들에게 잡혀 죽을 줄 알았으나 그 강도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는 판에 요행히 풀려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지방 장관은 우리의 여권을 잘못 보고 우리 수행원들을 잡아다가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위험과 공포에서 우리를 보호하여 안전히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셨다.” 미국 공사로부터 조선 국토내에서는 절대로 세례를 주지말라는 주의 때문에 이 여행에서 세례를 받고자 하는100여명의 조선 사람 중 30명을 선별하여 압록강을 넘어가서 만주 땅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조선은 이미 거둘 시기가 되었던 것입니다.“….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요 4:35-36).
언더우드 부부는 1890년 9월 첫 아기 원한경을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는 비록 서양사람이지만 원한경은 어릴 적 친구들이 거의 다 조선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조선인이나 마찬가지로 자라났습니다. 가장 자주 만난 아이는 김규식이었습니다. 원한경보다 무려 9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친구라기 보다는 형이었습니다. 김규식은 1887년 7세 때 언더우두의 양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굶어서 죽게 된 고아 번개비(김규식의 어릴 때 이름)가 하도 불쌍해서 집으로 데려다가 약을 지어 주고 밥을 먹여서 양아들로 삼았던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김규식이 성장한 다음에 학교에 보냈고 16세가 되던 해 1896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버지니아 주 세이런에 있는 로고노 대학을 졸업하고 8년 후인 1904년에 귀국하여 YMCA 간사와 경신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양아버지 언더우드의 비서 일도 하다가 그 뒤 새문안 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습니다. 한편, 원한경은1906년 17살 때 1년간 가정교사를 따라 유럽을 탐방한 뒤 1908년 미국 뉴욕 대학 문학부에 입학하여 1912년 졸업합니다. 이렇게 준비된 김규식 박사와 원한경 박사는 각기 대한민국의 독립과 학교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됩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민족의 발전에 크게 공헌할 2세를 길러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하고 배워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 37-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