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나눔

2017. 8.14 – 18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1883년 민영익은 조선통신사의 대표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던 중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가우처 박사는 이 요청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조선선교헌금을 하면서 1884년 1월 당시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조선의 답사를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멕클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조선에 입국하여 당시 정부의 고위 관직에 있던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에게 조선에서 선교회가 교육과 의료사업을 할 수 있도록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조선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고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선교사에게 안수하고 파송에 들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알렌 선교사는 1884년 9월 중국에서 선교하다가 먼저 의사의 자격으로 입국해 있었습니다. 1884년 12월 1일 조선에 갑신정변이 터졌고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민영익은 서재필의 칼을 맞아 온 몸에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한의사들이 고칠 수가 없자 미국 공사의 추천으로 알렌이 수술하고 명주실로 꿰매어 완치시킴으로 서양 의술의 탁월성을 보여줌으로 선교사들이 왕실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알렌은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연대의대의 전신)을 세워 조선인들을 치료하기 시작함으로 조선 선교의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조선 선교는 병원, 학교, 교회의 삼각편대로 이루어져 병원과 학교를 통하여 복음의 밭을 기경하고 교회는 추수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눅 10:2).

연세대학교 총장실 앞마당에 동상 하나가 서 있습니다. 그 동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동상의 명문은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었다고 합니다.
“이 동상은 에취 지 언더우드 박사라. 쥬강생(주님오신날) 천칠백팔십오 년 사 월에 박사 이십오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 땅에 옮겨 삼십삼 년 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큰 학교론 연희전문이 이루히니 그럴사 박사 늙으시도다……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쇠함을 볼 때 누구든지 고심으로 조선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갈수록 깊으며 적은 힘을 모아 부은 구리로서나 방불함을 찾으려 함이라, 뉘 박사의 일생을 오십칠 세라 하더뇨. 박사- 의연히 여기 계시도다.”
천구백이십칠 년 시 월 삼십 일 조선인 동지 일동
언더우드, 곧 원두우 목사가 주님의 모범을 따라 조선 선교의 몫을 다하고 이승을 떠나신 지 12년 뒤인 1928년 4월24일 이 동상이 연희전문 교정에 세워졌습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언더우드의 본명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로서 1859년 7월19일 영국 런던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 1877년 열아 홉 살 때 뉴욕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몹시 가난하여 20여리 길을 걸어서 통학하며 4년간 학업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뒤 1881년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목사가 된 뒤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에 뜻을 두고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인도 사람들에게 봉사할 목적으로 1년 동안 의학과 인도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왜 너는 조선으로 가지 않느냐?” 이후 방향을 조선 선교로 돌린 언더우드는 1884년 7월 28일을 기하여 미국북장로교선교부로부터 초대 조선 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습니다.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 조선선교준비를 하는 중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발견하고 깜작 놀라 “아! 내가 개척 선교사인 줄 알았더니 조선 사람이 앞질러 성경을 번역했군!”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감탄 속에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타고 1885년4월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부두에 상륙하였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7-48).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에 상륙한 배에는 감리교의 선교사 아펜젤러(1858년생) 부부가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언더우드는 같이 오던 감리교의 개척 선교사 아펜젤러와 더불어 조선 땅을 먼저 밟으려고 다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억측에 불과할 뿐, 언더우드는 부인을 동반하여 상륙하는 언더우드에게 여성 존중의 신사도를 발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불과 4개월밖에 안 되어 정국이 불안한 시기였으므로 부인 그것도 임신한 부인을 동반한 아펜젤러는 입국을 거절당하였습니다. 미국 공사는 아펜젤러에게 일본에 돌아가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다시 오라고 지시를 받고는 다시 배에 올라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독신으로 온 언더우드는 입국이 허락되어 4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언더우드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함께 조선선교를 갈 것을 거부하여 파혼하고 혼자의 몸으로 왔습니다. 그가 미국을 떠날 때 주위에서는 “어떻게 독신으로 이역만리 외국에 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으나 결과적으로 개신교 목사로서는 제일 먼저 우리나라에 정식 입국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4년 뒤 1889년 민비 주치의였던 의사 홀튼 선교사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언더우드 선교사는 처음 서울에 입성한 지 사흘만인 4월 10일부터 알렌이 2월에 개설한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열심히 한국 말을 익혀서 불과 1년 만에 전도를 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졌다고 합니다. 실로 그는 학자이면서 한국어의 대가여서 한국에 도착한지 불과 4년 째 되는 해인 1889년 한국어 문법과 영한 사전을 편찬 간행하였습니다. 성서번역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소천할 때까지 그 초대 위원장으로 시무했습니다. 특히 그는 신구약성경을 번역하되 순 우리말로 번역했으며 순 한글로 표현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는 한학자이기도 했지만 성서를 번역할 때는 한자 말투를 배제하고 순 우리말을 채용함으로써 우리 문화사의 금자탑을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1886년 고아원과 고아학교를 창설하여 그 당시 4, 5세된 고아 하나가 언더우드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 고아가 커서 언더우드의 비서가 되고, 그 뒤 새문안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김규식 박사입니다. 이와 같이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의 선교뿐만 아니라 교육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뿌리를 다졌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한 분입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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