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31 – 8.4
죽음을 통한 생명의 원리가 작동하는 셋째 영역은 선교입니다. 고난은 선교에 없어서는 안 될 측면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 26세의 청년의 나이로 인천항에 내린 발걸음은 개신교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당시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조선의 마음” 이라는 기도문을 묵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 주여,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뿜 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 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하면 의심하고 화 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 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52:7).
이사야 42-53장에 나오는 주의 종에 대한 놀라운 진술을 보면, 그의 소명은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 전에 조롱과 박해를 견디어야 합니다. 그는 “모든 민족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거부당할 것이며 자기 생명을 죽음에 내어놓을 것입니다. 더글라스 웹스터라는 분은 이 주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해설한 것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선교는 곧 수난으로 이어진다. 성경적인 범주에서 …. 그 종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 그럴 때 선교는 더욱 효과적이 된다. …. 모든 형태의 선교는 어떤 형태든지 십자가로 이어진다. 선교를 모양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십자가 모양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선교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성취할 것임을 분명히 아셨고, 선교에는 고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요한복음 12장에는 헬라인 대표단이 빌립에게 와서 예수님을 만나자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인자가(십자가에서)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 하도록 보존하리라”(요12:23-25). 주님은 여기서 다시 생명과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며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 복음은 이방 세계로 확장될 것입니다. 죽음이 바로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씨가 죽지 않는다면 그 씨 하나만 남을 것이나 그 씨가 죽으면 엄청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 먼저 적용되어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화평의 길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얘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에도 동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때 주님을 따르던 사도 11명 중 요한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전원이 순교하였고, 사도 요한 역시 끓는 기름 가운데 던져져 아무 해를 받지 않고 살자 밧모섬에 귀양을 갔던 고난의 순간들이 점철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천하만국에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선교적 고난에 대한 성경적 기초는 사도 바울을 언급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 놀라운 선언을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2). 여기서 사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처럼 구원을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 말은 사람들이 복음을 통해 생명을 얻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의 의미와 미칠 파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선포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어서 구원의 수단으로서 모세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의 엄청난 반대를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사도 바울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어린 양과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복음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결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목도했던 용감한 선교사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대한 민국에도 오늘날과 같이 복음의 뿌리가 내리기 전에 많은 선교사님들의 그리스도 복음 전파를 위한 불굴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그분들이 묻힌 양화진 묘역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하다”는 비문도 들어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열전”을 쓰신 전택부(2008년 소천) 작가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이 처음 집필된 1979년 당시의 양화진 외인묘지는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폐허지였고, 흉터처럼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곳이었으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쓸한 땅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서울시 당국은 지하철 공사를 하는데 지장이 있다고 해서 이 묘지를 옮기려고도 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천주교의 절두산 성지와 양화진 묘역 사이를 오갈 수 있게 이으면서 그 일대가 공원화되고 모두 성지 순례지로 변했습니다. 작가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는데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다고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위하여 한국에 목숨 걸고 선교하러 오신 선교사님들을 하나 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