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말씀나눔

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올 때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과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의존하는 인생의 단계를 거쳐 간 뒤 다른 사람의 사랑과 보살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하거나 참담한 현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육체적인 본성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계획의 한 면입니다. 당시 87세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영국의 노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 앞가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살았으면 행복하겠어요. 짐이 되느니 죽는 게 낫죠” 그러나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고 목사님은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내게 짐이 되도록,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기에 교회에서 이런 짐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짐(무거운 짐을 의미함)을 짐으로 “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실천하여야만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2-5)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명령하고, 5절에서는 “각자가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한국말로 번역은 같은 단어인 ‘짐’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리스어의 경우 양자가 틀립니다. 2절에서 ‘짐’ 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바레’로서 먼 거리를 나르도록 예상되는 무거운 짐을 지칭하고 있으며, 5절의 그리스어는 ‘포르티온’으로서 도처에서 배에 실는 짐, 군인의 배낭 혹은 순례자들이 지고 가는 배낭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두 단어의 뉘앙스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혼자 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서로의 짐들을 함께 지고 가야만 하지만, 우리가 나눌 수 없는 짐 역시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스스로 지고 갈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짐이기 때문에 나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짐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책임져야만 하는 짐으로서, 그 날에 당신은 내 짐을 질 수 없고 나는 당신의 짐을 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3-14).

스위스의 유명한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폴 투르니에 박사(1898 – 1986)는 “퇴직과 노년의 심리학” 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인격적이 되라는, 인간이 되라는, 우리의 인격적인 모든 자원으로 노년을 맞이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사물을 우선시했고, 사람보다는 사물에 기초한 문명을 세웠습니다. 노인들은 사람으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 더 이상 생산자로서의 가치는 없는 순수하게 그저 사람이기 때문에 무시당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야… 인격적인 관계라는 진정한 사역에 필요한 시간과 자격을 갖게 됩니다.” 어느 독일의 한 여기자가 할머니로 분장하고 시내를 다녀보았다고 합니다. 이때 그녀는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무관심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였습니다. 부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부를 의지하고, 권력자는 늙을수록 더욱 권력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축복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잠 31:30).

기독교는 생명, 즉 영원한 생명, 최고의 생명을 주는 종교입니다. 삶과 죽음은 우리가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두 가지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명에 이르는 길이 죽음임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통한 생명은 기독교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 둘 다의 가장 심원한 역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먼저 구원과 관련하여 죽음과 생명을 보자면 구원은 종종 생명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가 영생이라고 썼고(롬6:23), 요한은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요일5:12). 또한 이 생명의 독특한 특징은 그 영원성이 아니라 향후 도래할 새 시대의 생명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의 사귐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요17:3). 하지만 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죽음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죽음인 이유는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죄이며, ‘죄의 삯은 사망’(롬6:23)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죄와 죽음은, 범법 행위와 그에 합당한 형벌로서 함께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끝일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에 오셔서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는 죽어 마땅하지만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죽어야 할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으로 이루신 일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고 우리가 믿고 주장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내적으로는 믿음으로 외적으로는 침례로 우리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롬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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