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누가복음 10:30-37

한센인 발생률은 국내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감소추세에 있으며 한국은 이미 1980년도에 WHO에서 정한 한센병 퇴치 목표를 도달하였고, 매년 약 10명 정도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할 정도입니다. 의료진들의 노력과 병력자들의 협조 그리고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은 한센병 퇴치의 단계를 지나 앞으로 25-50년 이내에 한센병 박멸도 가능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한센병은 1879년 나균을 발견한 한센이라는 노르웨이 의학자의 이름을 따서 사회적으로 통용되나 의학적 용어는 레프러지(leprosy)입니다. 한센병은 그때까지 유전되는 병으로 생각되었으나 한센 에 의해 전염되는 병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후로부터 환자를 격리 치료나 소독 치료들에 관한 새로운 치료 방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여수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는 최초의 민간전문병원으로서 1909년 광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후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의료 사역에 힘써왔는바 오늘날은 한센병 환자가 크게 줄어들어 소아마비와 인공관절등의 시술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 병원은 예수님의 비유인 “선한 사마리아의 정신”을 그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그 설립동기는 바로 포사이드 선교사입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1873년 12월 25일 미국 켄터키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어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1898년 루이빌 의과 대학을 졸업하여 인턴과정을 마친 뒤, 쿠바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제대 후인 1904년 한국 군산에 부임하여 활동하던 중 괴한의 습격으로 귀에 자상을 입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2년 뒤 한국으로 되돌아온 포사이드 선교사는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했습니다. 1909년 동료 선교사 오웬이 병에 걸려 위독하자 의사 윌슨은 혼자 치료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목포에서 의료 선교를 펼치던 포사이트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포사이트는 배를 타고 나주에 도착하여 나주로부터 광주로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때 윌슨 선교사는 최흥종외 1명의 청년을 나주로 보내어 포사이드 선교사를 안내하도록 하였습니다. 나주의 선착장에 도착한 포사이드는 두 명의 청년의 인도를 받아 말을 타고 광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나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포사이드는 즉시 말에서 내려 그 여자를 가슴에 앉고 말에 태웠습니다. 광주의 병원에 이르자 이미 오웬 선교사는 죽은지 2틀이 지났습니다. 오웬 선교사의 침대에 그 나병 환자를 뉘고 치료를 시작하자 병원에 있는 환자들의 큰 반대에 부딪쳤고 할 수 없이 벽돌굽는 가마로 그 환자를 이동시키기 위해 포사이드 선교사는 다시 환자를 가슴에 앉았습니다. 그 와중에 여자가 잡고 있던 지팡이가 떨어졌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함께 있던 최흥종 청년에게 그 지팡이를 들어서 자기에게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최흥종 청년은 도저히 나병 환자가 잡았던 지팡이를 들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 지팡이를 자신이 집어 나병 환자와 함께 벽돌 가마에 놓았습니다. 일주일 정도 치료한 뒤 포사이드 선교사는 다시 목포로 되돌아갔고 그 환자는 윌슨 선교사의 몫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윌슨 선교사는 광주에서 나병환자의 진료를 시작하였고 전국에서 나병환자들이 몰려들자 조선 총독부는 여수로 이전시켰고 거기서 애양원은 그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비유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애양원의 설립이념이자 존립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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