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5 – 9
우리는 제자도를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만 제한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더 넓은 시각으로 보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중 하나가 창조된 환경을 돌보는 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관계를 세우셨다고 증언합니다. 첫째, 인간과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형상으로 그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들 서로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태초부터 복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신 선한 땅과 피조물들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 관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졌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으며, 그들 상호간에 쫓겨난 책임에 대하여 책임을 전가하였고,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선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속 즉, 회복 계획에는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 때문에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신음하는 창조 세계를 해방시키는 일 역시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들로서 회복을 위한 일꾼이 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1).
성경은 증언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완전한 미래를 향한 우리 소망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창조 세계 전체가 신음하며 새 창조의 산고를 겪을 것입니다.(롬8:18-23).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런 모습을 지금 얼마나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날에 부활할 우리 몸에 대한 소망이 현재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듯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지금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더 귀중히 다루게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땅은 하나님의 것이지만(시24:1) 우리에게 위임되었다는(시115:16)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보존하고 개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우리가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청지기라면 우리는 땅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 반대 극단을 피하고 자연과의 더 나은 관계를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자연을 신격화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범신론자들은 하나님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 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정령숭배자들은 자연 세계를 영들이 거처로 삼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으며, 뉴에지 운동은 자연은 스스로 충족되고, 스스로 조정되고, 스스로 영속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이 모든 혼란은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창조주가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의 세계라는 기독교적 인식은 모든 과학적 유산에 없어서는 안 될 서막이며, 오늘날의 지구 자원 개발에도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기 때문에 자연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님인 양 경배하지는 않습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148:1-5).
둘째, 우리는 자연을 착취하는 반대 극단도 피해야 합니다. 자연에 대해 하나님인 것처럼 굽신대서도 안 되고, 우리가 하나님인 것처럼 오만하게 자연을 대해서도 안됩니다. 창세기 1장은 환경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를 나타낸다는 이유로 부당한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명령하셨고, 이 두 히브리어 동사가 강력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 그것을 파괴하라고 우리에게 위임하셨다고 상상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배권은 파괴적인 지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취지대로 땅을 다스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 28).
셋째,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 세계의 일부임은 확실합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창조주에게 의존하고 있듯이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인간의 동역자 관계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분이 땅을 창조하셨지만 그런 다음 우리에게 그것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동산을 꾸며 놓으셨지만, 그런 다음 아담을 거기에 두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라”고 하셨습니다(창2:15). 이를 종종 문화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자연이지만 그 자연으로 우리가 하는 일은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존해야 할 뿐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원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 만물의 즐거움과 유익을 위해 창조 질서를 변화시키는 것은 고귀한 소명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일은 예배의 표현이 됩니다. 왜냐하면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에는 창조주를 향한 우리 사랑이 반영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