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9 – 6.2
그리도인은 어떻게 성숙할 수 있을까요? 골로새서 1:28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고 신뢰하고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볼수록 그분은 우리의 헌신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더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패커 박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서론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왜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왜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썼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그리스도가 왜소하기 때문에 우리는 왜소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종교 시장에는 많은 예수가 나와 있습니다. 자본주의자 예수와 사회주의자 예수, 금욕주의자 예수와 탐식주의자 예수가 대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예수들은 모두 결함이 있으며 이 중 어느 예수도 우리의 예배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 각각의 예수를 자신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성숙에 이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선하고 참된 시각이 필요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오늘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장엄한 기독론적 본문 중 하나인 골로새서 1장 15-20을 존 스토트 목사님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하신 것을 적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본 사람은 누구든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분은 또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그분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먼저 나신 분으로서 권세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주님이시자 머리’ 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만물은 대행자 되신 그분을 통하여, 머리 되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 안에서 만물은 통합되고 일관성을 갖습니다. 또한 그분은 몸 된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처음이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기에, 만물 가운데 최고의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모든 충만이 거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이 자신과 화해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머리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되새겨 보면서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시를 바랍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잘 것 없고 미약하며 왜소한 예수는 치워버려야 합니다. 광대 예수, 대중의 스타 예수, 정치적인 메시아와 혁명가 예수도 치워버립시다. 이들은 성경의 예수를 어설프게 모방한 것입니다. 이런 모방된 예수를 성경의 예수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계속 성숙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진정한 예수는 오직 성경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부께서 그려 내신 성자의 모습에 성령이 색을 입히신 것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성경에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 5:39).
성숙에 대한 부르심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골로새서 1장 28절의 본문이 “각 사람”이라는 말을 3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래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3번이나 반복한 데는 초기 영지주의라고 알려진 골로새 이단이 그 배경으로 보입니다. 이 초기 영지주의는 두 계급, 혹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한쪽에는 ‘피스티스(믿음)’로 연결된 ‘호이 폴로이’(평범한 자들)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그노시스’(특별한 지식)를 전수받은 ‘호이 텔레이오이’(완전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독교 엘리트주의를 혐오하며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영지주의의 용어인 ‘텔레이오스’를 그대로 가져와 모든 사람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텔레이오스’(성숙한 자)로 세우기 위해 모든 사람을 권하고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은 단연코 특별한 소수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텔레이오스)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8-29).
제자도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빈약할수록 우리 제자도는 빈약할 것이고, 반면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풍성할수록 우리 제자도도 풍성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의 성숙을 위하여 자기 안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고하며’ 라는 동사의 헬라어는 농부의 수고를 묘사할 때 사용되고, ‘애쓴다’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도의 운동 선수들에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둘 다 근육이 튀어나오고 땀이 흐르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힘으로만 전력투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적인 힘을 입을 때조차 그는 수고하며 애써야 했습니다. 리더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성숙해지는 것은 물론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이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자로 세워지기를 간절히 원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