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헬렌 이라는 미국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은 여러 해 동안 낙태 업종에 종사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께 오기 전 그녀는 날마다 시술고에서 버려지는 태아 조직을 봐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건 것들은 그녀에게는 물건에 불과하였고 자신의 일 처리의 대상으로만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를 그리스도께 인도한 부부는 그녀에게 고린도 후서 5:17을 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자기 외모가 달라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영접 기도를 한 후 거울을 보았을 때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똑 같은 헬렌이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실망하였고 자기 기도가 제대로 통한 건지 의아해 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직장에 가서야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시술소에서 낙태 현장을 보면서도 그녀에게는 태아의 조직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날 아침에는 죽은 아기들이 보였습니다. 헬렌 안에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결과입니다. 처음 시작은 이렇게 성령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되어 우리의 속사람의 변화는 겉사람의 생활 방식에도 여러가지 중요한 변화를 낳게 됩니다.(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71)
그러나 우리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많은 생각들이 있고 이런 생각들에 집착하라고 하는 마귀의 유혹 역시 매우 심합나디. 변화는 계속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아홉가지 열매인데 이를 맺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지만 성령님은 이 일들을 위하여 대부분 우리의 적극적인 순종의 노력을 받기 원하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희생제사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여야 합니다.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17일 드디어 동력장치를 단 비행기를 발진 시켜 하늘로 날아가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2초 동안 36미터를 날아갔고 이 날 최고로 멀리 날아간 것은 59초동안 244미터를 날았습니다. 이어 지속적인 개량을 통하여 1904년 45분동안 비행에 성공하였고, 1905년에는 40킬로미터를 비행하였습니다. 그 후에 여러국가들의 엄청난 노력으로 지금은 초음속 비행기는 물론 우주를 비행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행기의 성능은 업그레이드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것 역시 이런 자기 부정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만드시는 것이지만 그렇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에는 가나안 농군 학교 교목 오세택 목사님의 목회 경험담을 들려 주고 있습니다. “그분이 부산 모 교회에 부목사로 봉사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담임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교회에서 가장 신실하기로 소문난 여 집사님이 목사실에 들어왔습니다.그리고 거기 앉자마자 며느리에 관한 하소연을 시작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며느리 험담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이윽고 집사님의 말이 끝나자 담임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집사님을 위해 성경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며느리로 인해 속상해 하는 자신에게 위로나 격려의 말씀을 주시리라 기대했던 집사님은, 담임 목사님이 일러 준 성경구절을 찾아보곤 금방 안색이 변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집사님은 목사님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하지만 우리 동양에서는…..” 하다가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을 삭이지 못해서입니다.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집사님 정말 구원받으셨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아 거듭났노라 고백은 하면서도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 대신 유교의 관습과 전통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목사님이 새삼 구원받았냐고 물은 것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지를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 본질적인 물음 앞에서, 그 때까지도 분을 삭이지 못하던 집사님은 마침내 고개를 숙였습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이에 목사님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집사님 우리는 공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지배를 받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말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면 집사님이 먼저 죽으세요. 집사님이 며느리에게 먼저 종노릇하십시오. 그래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요, 그 때 우리 주님께서 집사님의 가정을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 날 목사님과의 면담을 통해 그 집사님은 정말 거듭났습니다. 이튿날부터 며느리가 일어나기 전에 밥을 짓고, 오후에 며느리가 바쁠 때는 시장도 다녀왔습니다. 며느리를 위해 정말 사랑으로 종노릇하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며느리에게 사랑의 종노릇을 하는데, 어찌 며느리가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시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한 며느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었고,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시어머니에게 종노릇하였음은 물론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 주님의 영께서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보여주시고 그대로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