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우리가 명백히 주장하고 확립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입니다. 그 분의 성육신이 유일하며(그는 한 분이자 유일하신 신(God-man)이심), 그 분의 속죄가 유일하며 (그분만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음), 그분의 부활이 유일하기(그분만이 죽음을 정복하셨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예수 외에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탄생),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죽음), 죽음을 이기신(부활) 이가 없으므로 오직 그분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자격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대한 이순신 장군으로 부를 수 있지만 위대한 예수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 그분은 위대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신(the Only)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같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니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그리스도인 제자들이 맞서야 하는 또 다른 풍조는 물질주의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물질 세계를 창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좋은 것들을 누리도록 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과 부활, 그리고 침례와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통하여 물질 세계의 질서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템플은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서 가장 물질적인 종교라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질주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주의는 영적 삶이 질식당할 정도로 물질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탐심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선함을 긍정하지만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검소하고 관대하고 자족하는 생활 방식을 익혀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1-12).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라고 말씀하신 후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라고 이어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1:21) 라고 한 욥의 말을 의도적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의 삶은 알몸이 되는 두 순간 사이의 짧은 순례 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짐을 가볍게 하고 여행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8-10).

물질주의와 관련하여 생각하여야 할 것이 광야에서 예수님이 받은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십일간을 금식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받던 중 마침내 마귀가 한 인격체의 모습으로 나타나 시험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마귀는 주문을 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신명기 8:3절을 인용하여 그 유혹을 거절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돌로 떡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물질을 하나님 보다 위에 올려놓으므로 아담 처럼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 구원의 길은 좌절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연코 이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물질에만 초점을 맞추라는 마귀의 간계가 제1계명과 제3계명에 위배됨을 파악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극한 육체의 필요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주의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위에 놓으심으로 계명을 지키는 길을 걸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쫒는 길 이것이 물질주의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세번째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현대의 풍조는 윤리적 상대주의입니다. 이 상대주의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영역은 성 윤리의 영역입니다. 이전에는 일반적으로 결혼이 일부일처제여야 하며, 다른 성과 평생 동안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성적 친밀함을 위한 유일한 환경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혼 관계에 꼭 필요한 헌신이 빠져버린 혼전 동거가 널리 퍼져 있고, 동성애 관계 역시 드러내놓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풍조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기준을 따르고 순종하라고 제자들에게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정의하시면서, 창세기 1:272:24을 인용하신 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셨습니다 (19:4-6).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토대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임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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