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말씀나눔

2017. 4. 17-21
어제 4월 16일 주일은 부활절이었습니다. 부활의 첫 증인은 단연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4개의 복음서 전부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나옵니다. 주님의 부활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는 죽은지 4흘만에 주님의 권능에 의해 다시 살아났지만 그것은 다시 죽을 몸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결국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이런 불멸의 몸을 가지시고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만유의 주님으로 등극하셨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불멸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들을 당신 발 아래 복종시킬 때까지 주님은 반드시 왕으로 통치하셔야만 합니다. 맨 마지막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이 없어질 때는 모든 신자가 불멸의 몸으로 부활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입니다. 그때까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뒤 주님은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도 복종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유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

인간은 통상 자신의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의 욕구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욕구 달성에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라고, 그리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워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처지가 좋든지 고통스럽든지 간에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4:10-13). 그 비결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고백 속에 담겨 있습니다. 바울의 목표는 자신의 안락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욕구가 충족된 여부에 불구하고 심지어 감옥과 순교 직전에도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기에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오늘 부터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마지막 책인 “제자도”를 가지고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교회는 주변 세상에 대해 이중적인 책임을 가집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세상 속에 살고, 세상을 섬기며, 세상에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세상에 오염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도피하여 거룩함을 보존하려 해서는 안 되고, 세상에 순응하여 거룩함을 희생시켜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너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그래도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 18:3-4).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겔11:12).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외식하는 자와 이방인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들을 본받지 말라”(마 6:8). 여기 제자도를 향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주변 문화를 따르지 말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즉, 기독교 반문화(counterculture)를 발전시키라는 부르심이며, 타협하지 말고 참여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우리가 맞서야만 하는 현대의 풍조는 무엇이 있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은 네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나르시시즘.

다원주의는 모든 ‘─주의’는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모두 동등한 존중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기독교가 최종적이며 유일하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한낱 우리의 의견일 뿐인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원주의의 정신에 대하여 겸손하며 개인적인 우월감은 조금도 비치지 말아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최종성에 대하여 확고한 자세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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