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장 1-4
1905년 한국이 을사보호조약으로 그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양반고을’ 공주에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선교사 샤프와 윌리엄스, 토착전도인 윤성렬과 안창호등이 2년간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교인 수는 50명을 넘지못하였습니다. 그러나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계기로 한강 이남에도 강력한 부흥이 시작되었으며, 공주에서 가장 강하게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4월에 열린 공주읍교회 부흥회에서 교인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였다 하며 간음하였다 하며 속이고 도적질하였다 하며 우리 주를 입으로만 믿었다 하며 어떤 이는 그간 안창호씨를 원수같이 보았다하며 슬피 애통으로 서로 위로하며 날마다 이와 같이 일주일 동안 지냈더니…”(신학월보, 1907.4.21).
부흥회가 끝나고 교인들의 신앙 체질이 바뀌었고 체질이 바뀌면서 전도에도 열심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새 교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년 사이에 교인이 2백 명으로 늘었습니다. 서너 칸짜리 초가 예배당으로 감당할 수 없었지만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재정능력은 없었고 다만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기도는 1년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1909년 공주읍교회는 3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ㄱ’ 자 벽돌 예배당을 지었고 이를 ‘협산자 (挾傘者) 예배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미국감리교회 감독은 공주읍에 새 예배당이 필요하다는 선교사의 편지를 받고 건축비 지원문제로 고심을 하고 있었습니다…..어느날, 마침 비가 오고 있었는데 한 낯선 신사가 감독을 찾아와 감독과 대화하던 중 한국의 공주읍교회 사정을 듣고는 상당한 액수의 선교 헌금을 내놓았습니다” 감독은 거금을 내놓은 그 신사의 이름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에 그의 이름을 딴 예배당 건물이 세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국교회 예배당은 대부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서울 상동교회가 ‘미드 메모리얼 회당’ ‘피어선 성경학교’ ‘세브란스병원’으로 불린 것이 대표적임 – 그러나 그는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지요’ 결국 감독은 그 돈을 공주읍 교회에 보내면서 “ ‘옆구리에 우산을 끼고 온 사람이 놓고 갔다”만 알려주어서 공주읍 교인들은 그 익명의 기부자를 ‘낄 협, 우산 산’를써서 협산자라 했고 공주읍 교회 예배당은 ‘협산자 예배당’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덕주,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81-83)
그 옛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 판 둘을 받았습니다. 그 돌 판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2백만명에게 직접 하늘에서 말씀하신 십계명이 적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기록한 것이고 그 두 돌판이 언약궤 속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여 고국 가나안 땅에서 쫓겨났고 성전은 파괴당하였습니다. 흩어진 백성 중 일부가 바벨론에서 돌아와 이스라엘을 재건한 지 오백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참다운 십계명의 의미와 당신의 제자들이 살아갈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헌금 및 구제와 관련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공주의 교회를 위해 익명으로 기부한 협산자 처럼 사람에게 칭찬을 바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칭찬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날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