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20
오늘 부터는 레이 스테드먼이 지은 “고통이 주는 교훈”(IVP 소책자)을 가지고 함께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책자는 약40년 전에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 당시에 그가 들은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갑자기 부모의 침실에 들어와 총을 쏘아 겨우 피한 뒤 경찰을 불렀고 경찰은 그 소년을 정신병원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넘기고 간신히 살아난 호된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필두로 암과 싸우는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난에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고 적고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때나 아니 인류 역사의 어느 순간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로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기란 무척 힘들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당할 때 먼저 보아야 할 성경은 로마서 5장1-5입니다. 오늘은 로마서의 이 부분을 읽고 묵상하면서 믿음과 시련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1:2-3).
17/2/21
로마서 5장 1절과 2절을 읽으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신자들에게 나타난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 하게 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 죽음을 넘어선 소망을 갖게 됩니다.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에서 기본적인 단계입니다. 그러나 3절 – 4절 에서는 고난이 주는 유익을 언급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고난이 이런 유익을 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때때로 고난을 뚫고 가야만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결코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여야만 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26:3).
17/2/22
우리는 힘든 일이 닥쳐 올 때 반사적으로 투덜대며 불평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필두로 신약의 모든 저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되게 고난 당할 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고난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다가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베드로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벧전1:6). 야고보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2). 바울: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그러므로 고난의 때에 더욱 주님을 신뢰하고 시험을 이길 지혜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17/2/23
출산을 앞둔 어머니는 아이를 낳는 문제로 근심합니다. 그리고 출산할 때 여성의 표정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지만, 그녀는 이 과정을 통해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고통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출산의 고통은 보람을 가져다줍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무슨 유익을 가져다 주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환난이 인내와 단련된 인격과 소망을 이룬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롬5:3-4). 먼저 ‘인내’에 대한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는 “어떤 압력 밑에서 견디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인내는 겁을 먹고 회피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인내와 가장 비슷한 동의어는 ‘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도 증거하고 있는 바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약1:2-3). 인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인내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인내를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3:5).
17/2/24
레이 스테드먼은 어릴 적 말에 대한 경험담을 들려 주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몬테나에서 자랐는데, 종종 조련사가 말을 훈련시키는 것을 거들곤 했다. 3살된 말에게 처음으로 안장을 얹는 일은 굉장히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말에게는 그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었을 것이다. 말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말들은 화가 나서 뒷발질을 하면서 도망을 가려고 하거나, 심지어는 앞발로 조련사를 내치는 경우도 있었다. 말들은 코를 벌름거리고, 눈알을 굴리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무서워서 서서 잘 움직이지 못하는 말도 있었다.” 아마 시련을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반응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면 겁이 나서 주님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온갖 걱정을 하곤 합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던 갈릴리 바다에서 배에 탔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은 우리를 견고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처음 겪을 때는 겁이 나고 당황되지만 주님이 폭풍우를 잠잠케 해주시는 것을 체험하고는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폭풍우가 닥쳐오면 이전처럼 두려움과 당황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며 역시 주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나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내적지식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