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0 – 14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한 주님의 가르침에 우리 역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사람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바리새인들의 유희이지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때때로 다른 신앙(정령주의자, 불교도, 이슬람교도, 힌두교도등)을 가지거나 다른 인종 혹은 국적의 사람들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가 베푸는 도움이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는 수단이 아닐 경우에는 그들을 섬기길 꺼리지는 않는가 역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과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선행의 동기가 순수한 관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수고는 무가치하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물질적 축복과 영적 부요함 둘 다를 나누게 하는 것이 주님이 명령한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선행에 대한 두 번째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 즉,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의 섬김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야만적으로 폭행을 당해 벌거벗겨지고 피를 흘리며, 기진맥진해 거의 죽게 된 그가 긴급히 필요로 한 것은 바로 상처를 치료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돌보아 주고, 필요한 부대 비용을 주막 주인에게 더 주었습니다. 이때 그는 유대인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지만 그의 주머니에 전도지를 넣지는 않았습니다. 최근까지 교회 내에서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의 우선순위에 관한 논쟁이 있었는데, 사실 이 논쟁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양자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간의 우선순위의 결정은 우리의 이웃이 처한 긴급한 필요가 무엇인가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이 두가지는 모두 이웃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이겠습니까?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사랑할 이웃은 육체 없는 영혼이 아니고, 영혼없는 육체도 아니며,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격리된 한 개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적, 영적, 사회적 존재로 만드셨고, 따라서 우리 이웃은 사회 속에 있는 영적, 육체적 존재입니다. 우리 이웃의 영혼이나 육체나 사회성 중 한 측면에만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읏울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을 여셨다는 죄사함의 복음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새로운 차원을 더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구원의 소식을 우리의 이웃과 나누어야만 합니다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우리 할 바를 충분히 다 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이 복음전도에 대하여 매우 어리석고 편협한 생각을 품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직 구세주일 뿐이며 인간의 창조주는 아닌 것처럼, 예수님이 단지 설교만 하셨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시거나 병든 자를 치료하신 적은 결코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이고 영원한 문제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문제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며 예수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두 가지를 병행하셨습니다(눅 8:1). 그리고 주님은 어느 한 가지를 한다는 것이 다른 일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나 구실이 되지않았습니다. 이 둘은 인간들을 향한 그의 깊은 동정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표현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중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님은 선행을 그분의 심판의 기준으로 삼으셨는데, 이 기준이야말로 그분의 모범과 가르침의 중요성을 날카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자신의 재림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분 앞에 모일 것이며,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선행이 있느냐 없느냐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마 25장 31절 이하). 이 구절은 종종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불려집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비유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을 양과 염소에 비유한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최후 심판의 매우 엄숙한 이야기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