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중생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중생이란 “거듭난다”는 의미로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나옵니다. 주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공적인 의미에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처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을 정화 시키고 많은 표적들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오시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믿지 않으셨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니고데모라 하는 산헤드린 멤버 중 하나가 비밀리에 주님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 니고데모는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육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구성분자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이 새롭게 바뀌어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구약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와 영생을 가질 수 있다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모세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을 가지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해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율법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상 매년 드리는 황소와 양들의 피로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히10:3-4). 그러므로 구약 성경이 가르키는 것은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희생 이외에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이 일을 행하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방법이 구약이 아니라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이 바뀔려면 자신이 죄인 것에 대한 회개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동시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을 성령님께서 새겨주십니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10:16-18). 그것은 마치 법들을 서판에 새겨 공포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치관 내지 생각들은 육신의 일들이 아니라 영의 일들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즉, 세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전에는 알지 못하고 오직 먹고 마시고 본능대로 살고, 사람들 사이에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게 되자 우리 죄 값을 치룬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그 특색은 영원한 소망을 품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좋지 않은 행실들을 죽여가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는 것이 중생이자 거듭남의 뜻이고 그렇게 거듭난 사람들은 우리를 사랑하사 당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굳은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속죄는 이렇게 중생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8-15).고 하심으로 중생의 문제 다음에 바로 예수님의 속죄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사랑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사랑없는 믿음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있는 사실에서 증명되는 것입니다(요한일서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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