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7/11~7/15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을 섬기기 위해 깨어졌을 때, 우리는 우리의 깨어짐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는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분의 희생적인 내어 주심에 대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응답했습니다. 그분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일이 잘 안풀리자 그를 버렸고 한 명은 팔아넘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운명과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종이 상전보다 클 수 없으며 우리의 주인이 멸시받고 거부당한 채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섬기고자 할 때 우리의 노력이 거부당하거나 생각대로 잘 안 되면 크게 실망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모든 수고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망하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부당한 모세는 애굽에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나오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기려고 하던 바로 그 백성으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자신이 애굽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났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치면서 40년을 보낸 모세를 하나님은 시내산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가운데 나타나셔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듭 거듭 사양하다가 드디어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라고 물러섰습니다. 사람을 죽이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모세는 그들에게 거절당한 사실과 40년 동안 광야에서 늙은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상황을 당하면 마음 속으로 “주님, 나는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없습니까?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능력 있는 사람 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제게 성취감을 줄 다른 사람을 섬기고 싶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처럼 가서 섬겨야만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박차시고 내려와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또 한 번 자신을 낮추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님을 높이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 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산 자와 죽은 자가 전부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 자가 행한 모든 것을 그 앞에 고백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본을 따라 인내하면서 섬긴 자들에게는 큰 칭찬이 주어질 것이며 말로만 주님을 부르고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데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깨어지는 삶을 배우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성공담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명성과 성공적인 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분은 신실한 신자들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그럴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영광의 소망,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케파 셈팡기 목사님은 1971년 한스 로크마커 여사의 도움을 받아 우간다에 고아원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마을에 가서 고아를 데려오는 일은 항상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이분이 차를 몰고 떠날 때면 다른 열 명의 고아들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까지 목사님의 차를 쫓아오곤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왜 다른 아이들은 내버려두고 한 명의 고아만 데려와야 합니까? 주님은 그 아이들을 모두 구해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깊은 좌절 속에 빠지곤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셨다는 깨달음을 가졌습니다. 주위의 필요는 분명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는 이럴 때 우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봉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겸손함을 배우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