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3/25-29)

고난주간

종려주일과 월요일: 2024년 부활절은 3/31일입니다.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는 춘분(3/21)이 지나고 첫 보름달 후 첫 일요일을 부활하신 날로 정했습니다. 3/21일 후  첫 만월은 3/24일(음력2/15)이며 그 후 첫 일요일은 3/31일입니다. 부활절 날짜가 결정되면 그 전 주가 고난주간입니다(3/24-3/30). 유월절 엿새 전 토요일(3/23),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 중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예비한 사건이었습니다(요12:1-8). 이튿날 일요일(3/24, 종려주일), 주님은 감람산 동쪽 중턱에 위치한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서쪽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가셨고, 벳바게에 이르자 오후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향하시자(마21:1-11/ 슥9:9성취), 앞 뒤로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호산나 찬양), 약 두 달 전 죽은 나사로를 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2:17-19). 이윽고 성에 가까이 가신 주님은 당신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예기하시고, 오히려 우셨습니다(눅19:41-44). 성전을 둘러보신 후 저녁이 되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막11:11). 월요일(3/25) 아침 성전을 향하던 중 시장하여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로 가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셨고 주님은 그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열매 맺지 못하여 심판받을 이스라엘 백성의 상징이었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등 정결케 하신 뒤, 날이 저물매 성 밖으로 나가셨습니다(막11:12-1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슥9:9).

화요일: 아침에 성전을 향하여 가는 중, 어제 저주하신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본 베드로가 질문하자,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0-25)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다가왔습니다: “무슨 권위로 가르치는가?” 주님은 그들에게 상속자를 죽이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로 답변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다(막11:27-12:12). 바리새인들이 헤롯 당과 함께 와서 세금문제로 시험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심으로 그들을 침묵케 하셨습니다. 이어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왔습니다. 그들은 형제가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는 계대혼을 규정한 모세율법을 따라, 한 여자를 차례대로 취하고 죽은 7명의 형제의 예를 갖고 부활의 문제점을 제기하였습니다. 주님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책망하신 뒤, 부활시에는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하늘의 천사들과 같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막12:13-27). 모든 사람이 부활하나, 악인의 부활은 심판을 의미하기에 의인의 부활인 생명의 부활만이 의미가 있습니다(요5:28,2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화요일: 성전에 계실 때 한 서기관이 가장 큰 계명을 묻자, 주님은 즉시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언급하셨습니다(막12:28-34). 그 이상의 계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묻지 못하였고, 오히려 주님이 질문 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백성들은 즐겁게 들었습니다(막12:35-37). 이어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또 자신들의 교훈을 행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질타하시고(마23장; 막12:38-40), 헌금함에 두 렙돈을 넣는 과부를 칭찬하셨습니다 (막12:41-44). 성전에서 나가실 때 웅장한 성전을 감탄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철저한 파괴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성전 파괴 시기와 주님이 다시오실 때의 징조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상세하게 답변을 주셨습니다(마24장, 막13장, 눅21장). 주님은 한 세대 내에 성전이 파괴될 것이고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쌓일 때 신속하게 성에서 빠져나올 것을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일은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성전은 약 40년 뒤인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게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베다니로 가신 것으로 보이며 수요일에는 아무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24:45-46).

목요일: 유월절 하루 전 주님은 큰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유월절을 드셨습니다(눅22:7-13). 식사 중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제자들(가룟유다포함)의 발을 씻기시고 자리에 앉으사 다시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를 섬기기 위해 인간이 되시고 죽고 부활하여 다시 영광의 자리에 앉는 모습의 축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밀고하러 떠났으며, 베드로는 순교를 장담하자 주님의 경고가 이어지는 등 분위기는 침울하였습니다(요13장). 주님은 곧 영광(십자가와 부활)을 받으실 것과 성령님을 보낸다는 약속 후(요14:16,17,26;15:26;16:7-15), 모든 제자들(후에 믿을 신자들 포함)을 위한 대제사장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요17장). 찬미를 부르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사, 유다가 인솔하는 무리를 기다리며 통곡과 함께 피땀 흘리시며 기도(1시간)하셨습니다. 잡히시자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이어 그 해의 대제사장 가야바(안나스의 사위)에게 심문과 곤욕을 당하였습니다. 이 대제사장들은 수일 전 성전에서 ‘무슨 권세로 가르치냐?’고 주님께 직접 힐문한 자들입니다. 주님은 “네가 찬송받으실 자의 아들이냐”는 가야바의 물음에, ‘그렇다’고 하신 뒤 당신이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단7:13) 그 ‘인자 人子 Son of Man’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선고를 내렸고(마26:62-66), 주님은 다시 능욕을 당하셨습니다(마26:67-68). 베드로는 3번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눅22:54-62). 이 사건은 700년 전 이사야에 의해(사53: 7-8) 미리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 8)

금요일: 아침에 주님은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왔다 갔다 하셨습니다(눅23:6-12). 결국 빌라도가 심문하였습니다. “네가 왕이냐?”고 묻자, 주님은 당신이 왕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셨습니다 (요18:36-37). 그 진리란 복음을 뜻하며, 이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하에 있는 것과, 당신이 세상 죄를 담당하실 그리스도이심을 말합니다. 아무 죄도 없었지만, 군중들의 위세에 눌린 총독은 십자가의 형을 선고합니다. 강도 두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은 7마디를 하셨습니다 (오전9시-오후3시).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23:34) (2) 한 명의 강도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보라 네 어머니라”(요19:26-27) (4) “내가 목마르다”(요19:28) (5) 오후 3시경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6) 이어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7)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요19:30). 오후 3시경은 유대인들이 1,500년 동안 유월절 양을 잡아온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출12:6). 부자이자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주님의 시체를 받아, 자기 묘실에 두었고, 이사야의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마27:59-60;사53:9). 사흘 뒤 부활 시까지 무덤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사야 53장 6-12에 기록되었으니,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매일묵상(2024/3/18-2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3)- 어린 시절

사려깊은 하녀로부터 엄한 교훈을 배우고 자랐지만, 모니카는 오히려 술마시는 악습에 빠졌습니다. 당시에 흔히 그랬듯이 모니카 부모님은 어린 모니카에게 술통에서 술을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그때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아주 조금 술을 맛보다가, 점점 더 빠져 결국 습관이 되었습니다. “작은 것을 멸시하는 자는 조금씩 넘어지게 된다”는 격언이 맞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만일 주님이 준비하신 약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우리의 이 은밀한 병을 고쳐 줄 수 있겠습니까?…주님은 다른 사람의 비수 같이 날카롭고 통렬한 모욕적인 말을 통해서, 어머니의 저 썩은 부분을 한 방에 도려내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모니카는 곳간으로 술을 가지러 갈 때에는 한 하녀와 함께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하녀와 단둘이 있을 때는 종종 다투었고 그날도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가 남몰래 술을 마시는 악행을 들추고는, “술주정뱅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지독한 모욕을 안겨 주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모니카는 그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악습을 끊었습니다. “친구들의 아부하는 말들이 우리를 망쳐 놓는 것처럼, 원수들의 모욕하는 말들은 흔히 우리를 바로잡아 놓습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 위함이 아니라, 격동시키고 괴롭히기 위함이었지만, 주님은 “광분한 하녀의 말”을 통해 모니카를 고치시는 약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우리의 어떤 권면과 훈계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치는 계기가 되었더라도, 마치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겸손입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4)- 결혼생활

어머니 모니카가 조신하고 분별력 있게 성장 한 것은, 인간적인 교육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고 말한 점은 새겨두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은 부모님을 넘어, 주님께 대한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외형상으로는 사려깊은 늙은 하녀, 모욕을 준 하녀 등을 통해 배우고 결단한 것이지만, 실상은 모니카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그녀에게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사람들과의 차이입니다. 혼기가 찬 모니카는 비그리스도인 파트리키우스를 남편으로 맞아들였습니다. 모니카는 남편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자신의 행실로써 남편에게 주님을 전하였고, 주님은 모니카의 그러한 행실을 사용하셔서, 남편에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인내로써 감당하였고, 그 일로 남편을 미워하여 불화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자비가 남편에게 임하여 주님을 믿고서 그 삶이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믿음과 인내 그리고 기도가 모니카의 ‘절대 무기’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주 너그럽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때론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니카는 화난 남편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어리석다고 보고 말도 행동도 조심하였고, 남편의 화가 가라앉고 진정되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서 자신의 행동과 그 이유를 조곤조곤 이야기 해서 오해를 풀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니카의 결혼 생활에 남편의 폭행은 없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와 인품입니다. “여러분은….썩지 않는 온유하고 정숙한 마음으로 속 사람을 단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값진 것입니다.”(벧전3:3,4)

잠언29:7절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지식이 없다’는 말은 단순히 학력이나 배움의 부족이 아니라,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학력이 높고 교육을 많이 받아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반면, 은혜를 통해 거듭난 사람들은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곤란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빨리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그들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2:16). 즉, 그들 모두는, 주 예수께서 인간이 되셔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셨으며, 병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셨고, 더나아가 당신의 몸을 죄인들을 위한 희생제물로까지 드리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시 죌레(1929-2003)는 뉴욕 성당의 한 집회에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우아한 차림의 한 여성이 나와, 자기가 본 남미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모두 미국 백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간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가 독재정권에 의한 탄압과 심각한 인권유린, 극심한 빈부격차, 개발과 성장이란 이름 아래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가 자행되어 온 곳이었지만, 그녀는 화사한 차림으로 고급호텔과 관광명소만 드나들며 남미의 겉모습만 보고 원더풀을 외쳤습니다. 마치 문 앞 거지 나사로를 무시하고 살아간 부자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본받아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언19:17)

잠언29:8절
“거만한 사람은 성읍을 시끄럽게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가라앉힌다.”(새번역)

본 절은 의인과 악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묘사합니다. 6,7절에 등장하는 ‘악인’을 ‘거만한 자’로 표현하는데, ‘거만한 자’는 히브리어 ‘라촌’의 번역입니다. ‘라촌’은 ‘입을 삐죽이다’, ‘비웃다’는 뜻이며, 권위의 멸시나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함을 내포합니다. ‘시끄럽게 하다’의 원어는 ‘야피후’이며, ‘불다’ ‘내뿜다’란 뜻으로, ‘불’이나 ‘거짓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전단은 거짓된 입술로 선동하여, 불을 일으킴과 같은 극심한 혼란을 야기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이유를 알게 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며, 그들은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게 합니다. ‘분노’는 악인에 의해 야기된 성난 감정으로, 의인은 그런 사회적 동요를 진정시켜 사회 질서를 회복시키는 지혜자입니다. 사회질서의 안정이야말로 평화스러운 삶의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BC 990년 경 일어난 둘째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 왕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반란 선동에 직면하였습니다. 세바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다녀서 얻은 추종자들을 이끌고 아벨 성에 들어갔고, 그들을 뒤쫓은 군대장관 요압은 토성을 쌓고 성을 쳐서 헐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아벨 성에서 한 지혜로운 여인이 나타나 요압을 진정시키고, 성읍 백성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요압에게 던짐으로 성을 보전하였습니다(삼하20:14-22). 다툼이 있을 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언15:1,새번역)

잠언29:9절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악인은 여기서 미련한 자로 등장합니다. 지혜자는 합리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만, 미련한 자는 교만과 탐욕을 버리지 않아서 그 분쟁은 그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 사이의 다툼은, 차분하게 결론으로 향하지 못하고 오직 혼란이 있을 뿐입니다. 이때 미련한 자는 목을 곧게 하고 어떤 지혜도 무시하려는 특질을 염두에 두면서, 치밀어 오르는 노를 자제해야 합니다. 잠언이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대답하지 말아라.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까 두렵다.”(26:4,새번역)라는 권고는 많은 경우 타당하므로, 그런 자와는 아예 논쟁 자체를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불가피한 다툼이 전개될 시, 본 잠언은 해결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의미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미련한 사람이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는 같은 말로 대응하여 주어라. 그가 지혜로운 체할까 두렵다.”(26:5,새번역)는 잠언이 참고가 됩니다. 솔로몬 시대에, 창기 두 사람이 산 아기와 죽은 아기를 두고 서로 다투다가 왕 앞에 왔습니다. 악한 여인이 벌린 이 다툼이 그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렇다고, 실제 어미가 자신의 아들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왕 앞에 온 것은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무시한 미련한 여인은, 증거 없음을 확신하고 거짓으로 일관하였으나 탄로 났고, 큰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상징입니다. 마지막 날 정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므로, 미해결의 문제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매일묵상(2024/3/11-15)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1)

어거스틴(AD354-453)의 「고백록」은 전 세계와 모든 세대에서 널리 읽힌 고전으로 어거스틴은 당대 제일의 수사학자요 신학자였기에, 뛰어난 문체와 신앙에 유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백록」은 어거스틴이 북아프리카 히포 교구의 주교로서 교구 성도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쓰여졌으며, 아들의 눈으로 보기에 어머니 모니카(AD332-387)성도는 훌륭한 어머니요 아내요 이웃이었습니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고, 수사학 교사의 직을 던지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여, 함께 아프리카로 돌아오던 중 로마의 항구 도시 오스티아에서 죽습니다. 이때 모니카는 자신의 기도를 너무나도 풍부하게 응답하신 주님의 선하심을 가슴에 품고 기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삶을 고백록에 적어 후세에 남기기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니카는 육신으로도, 영적으로도 그를 낳은 어머니여서, 그에게 육신의 빛과 영원한 빛을 모두 볼 수 있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니카가 훌륭한 어머니이지만 초점은 주님께 두어져서, 사사로운 정에 흐르지 않았고 경건함도 잃지 않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지금이나 그때나 동일한 사실 하나를 말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지은 것도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양육한 것도 아니었으며, 조부모도 자기들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오직 주님께서 어머니를 지으시고, 주님의 교회의 신실한 지체였던 한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주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의 교훈의 회초리로 양육 받게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p284). 이 대목은 우리 모두 가슴에 담아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2)

「고백록」에 따르면, 모니카의 신실한 삶은 자신의 열심이 아니라, 집안의 나이든 하녀 덕분입니다. 그 하녀는 모니카의 부친을 업어 키우다시피 했는데, 워낙 오랫동안 일해 온 데다가 나이도 아주 많고 성품도 훌륭해서, 그 그리스도 가정의 어른들도 그녀를 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 집안의 딸들(어린 모니카 자매들)을 돌보는 일도 그 하녀에게 맡겨졌고, 그녀는 성심을 다해 수행하였으며, 필요시 경건함과 엄격함으로 딸들을 엄하게 통제하면서도, 지혜롭고 사려 깊게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지금부터 1700년 전 북아프리카에서도, 여자들이 술에 빠져 사는 문제가 심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하녀는 술을 먹는 것과 같은 나쁜 습관이 아예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너희가 지금 물을 마시는 것은 술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너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 마시는 것도 절제하지 못하면, 나중에 결혼하여 부엌살림을 맡고 곳간을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면, 물은 쳐다보지도 않고 맨 날 술을 마셔서, 술 마시는 것이 몸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런 교훈과 함께, 자신이 가진 권위로 명함으로써 아직 어려 자신의 욕구들을 자제하기 힘든 그녀들을, 갈증나서 목이 타들어가도 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훈련을 통해 절제와 인내심을 갖도록 양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집안의 딸들은 자신이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은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녀들의 몸에 배게 하였답니다”(p284). 그러나, 모니카 역시 아주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은밀히 술 마시는 습관을 갖게됩니다. 주님은 어떻게 어린 모니카의 악습을 고치셨을까요? 모욕과 충격을 통한 금주의 결단입니다.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잠언3:15).

잠언29:4절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의(창기와 방탕)가 개인의 재산을 잃게 함을, 4절은 공적인 불의(뇌물과 중세 등)로 인한 국가의 파멸을 경고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 생기는 지혜를 갖고 정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후단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뇌물을 받는 자,’ ‘중세를 부과하는 자’ 혹은 ‘탐욕스러운 자’등으로 번역되나, 앞의 ‘정의’와 함께 생각하면,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모든 불의를 지칭합니다. ‘멸망시킨다’ 말은, ‘넘어뜨리다’, ‘파괴하다’란 뜻의 원어 ‘하라쓰’의 번역으로 성벽이나 건물의 파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사회와 국가를 공격해 무너뜨리는 ‘용맹한 적국의 장수’와 같은 존재입니다. 왕은 전력을 다해 그런 자를 발본색원하고, ‘정의로운 통치’를 확립해 혼란을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 교훈은 언제나 옳지만, 지혜로운 왕은 현실을 수용하는 통치기술이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태종때부터 무려 40년 간 공직에 있을 정도로 유능하고 처신에 밝았습니다. 그러나, 절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황중생의 궁중 창고 절도 사건, 처남들의 위법 행위에 대한 구차한 변명, 사위 서달이 아전을 죽인 죄를 은폐하려고 상주문을 조작한 행위 등을 알고도 세종대왕은 황희를 계속 중용하였습니다. 유능한 신하의 약점을 잡고 충성을 다하도록 한 세종의 통치기술로 생각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미워하는 자에게도 선을 행하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기술을 가져야 합니다(눅6:27). “지혜로운 왕은 악인들을 키질하며 타작하는 바퀴를 그들 위에 굴리느니라”(잠언20:26).

잠언29:5절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

5,6절은 ‘그물’과 ‘올무’라는 표현을 각 사용하여 악인은 타인과 자신을 멸망하게 하나, 의인은 기쁨과 행복의 삶을 누린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영원한 심판과 생명까지 함축되어 있음 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첨하는’에 해당하는 원어 ‘할라크’는 ‘매끄럽다’,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진실을 외면하고 이웃의 환심을 사려고 거짓된 칭찬의 말, 즉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 놓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물’에 해당하는 ‘레쉐트’는 새와 같은 사냥감을 잡는 도구로서, 누군가를 파멸에 이르게 할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문제는, 파멸의 대상인 ‘그’가 아첨하는 자 본인인지, 아첨을 받는 자인지 확실하지 않은 점입니다. 전자의 견해를 따르면, 남을 해하려는 악인의 아첨이 궁극적으로 자신을 멸망케 한다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견해를 따르면, 아첨을 받은 이웃이 올바른 상황 판단을 못하여 파멸한다는 뜻입니다. 6절이 전자의 사례를 다루기 때문에 후자의 견해가 좀 더 타당합니다. 좋은 예가 길르앗 라못에서 아람 왕국과 전투 중 죽은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악한 왕 아합의 승리가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부추켜서 아합은 확신을 갖고 전쟁터로 갔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합은 전사하였습니다. 악행을 보고도 책망치 않는다면, 파멸을 방조하는 행위입니다. 2001년 영화 ‘친구’에서, 친구 동수를 죽인 죄를 자백한 준석은 법정에서, “어릴 때 ‘너 그런 짓 하면 안돼!’ 라는 말 한 마디만 들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는 최후의 진술은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잠언13:14).

잠언29:6절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올무를 씌우는 것이지만,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한다”(새번역)

전단을 직역하면, “악인의 범죄에는 올무가 있다”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이익에만 초점을 두기에, 숨겨져 있는 파멸의 덫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바로 그 올무에 잡혀 파멸하는 악인입니다. 이른바 반전의 반전입니다만, 역사는 어느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사례들을 수 없이 증언해 왔습니다. 신천지 이만희 총회장은 수십억원의 교회 돈을 제멋대로 사용하여, 자신의 노후와 신혼집을 위해 ‘평화의 궁전’(가평)을 짓고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가, 서둘러 신천지 교회의 명의로 바꾸는 등 여러 경제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리석은 노인입니다. 대법원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확정하였습니다(2022.8.12). 현재 이만희 씨는 조심하지 않으면 집행유예가 취소되어, 90 고령에 수감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반면, 의인은 노래하며 즐거워하는데, 자신을 잡으려고 악인이 설치한 ‘올무’를 하나님의 은혜로 피하게 된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만들어 놓고 왕의 허락을 받기 위해 대궐로 들어 가고 있을 때, 왕은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의 일기를 읽다가 모르드개의 선행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침 왕국에 도착한 악한 하만에게 명령하여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혀 수산 성 전체를 다니며 높여주라고 합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섭리로 악인의 올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의 대적이 되시기 때문이며, 의인은 밤에도 발뻗고 잠을 잘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

매일묵상(2024/03/4-8)

누가복움6:29b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원수되는 둘째 예는 옷을 빼앗는 경우입니다. 누가복음은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고 기록한 반면, 마태복음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적어, 옷의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겉옷의 전당을 금지하는 모세율법과 미쉬나를 가진 유대인 독자를, 누가복음은 그런 규정이 없는 이방인 독자를 각각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데오빌로 각하에게 누가 역시 관대함에 관한 주님의 거룩한 명령을 전달해야만 합니다. 누가는 겉옷을 강탈당하는 상황을 전제하고, 겉옷을 빼앗길 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속옷까지 주라고 변형시켰습니다.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세관에서 일을 보고 있던 레위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듯이, 기꺼이 자신의 것을 주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매우 훌륭한 성경 해석 방법입니다. 작고하신 송기식 목사님은 어느날 교회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 칼을 대면서 돈 내놓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목사님은 ‘내가 목사인데 무슨 돈이 있겠냐?’ 하시면서 칼을 내려놓고 사정을 말해보라고 타일렀습니다. 도둑은 칼을 내려놓고 고향에도 갈 수 없는 사정을 털어놓았고, 목사님은 차비를 주어 보냈습니다. “현자는 남의 경험에서 배우고, 보통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고, 미련한 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서양의 고전의 중요성이 여기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영감된 지혜로 넘쳐납니다. 읽고, 묵상하고, 행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시119:99).

마태복음6:21절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 하셨는데, ‘중생’의 여부는 단순히 우리의 고백이나 느낌보다,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갖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 첫째 시금석이,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보물의 소재입니다. 하나님도 내세도 없는 이방인의 삶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어떤 집에 살며, 어떤 차를 살까’ ‘어떻게 해야 재물을 더 많이 모을까’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들의 보화는 ‘의식주’로 대변되는 생존, 부귀영화, 혹은 ‘자기실현’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논어의 이상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들은 인생의 전부나 목적이 아닙니다. 이는 지나갈 세상에 속한 것이라, 영원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주님의 칭찬과 그분과의 영원한 교제에 있습니다. 이 같이 참된 재산, 명예요 만족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지, 세상의 소유는 단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정도, 혹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정도면 족합니다. 만약 필요 이상의 소유가 주어졌다면, 재단법인을 세우든지, 선한 사업을 위해 기부하든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딤전6:17-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소유의 문제를 쉽게 해결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만이 채워지기 때문에, ‘자기실현’이라는 인본주의적 목표의 도달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잠언29:1절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이 잠언은 건설적인 비판을 무시하는 자에게 갑자기 닥쳐올 파멸을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에 해당하는 ‘토카호트’는 명사 ‘토케하=책망’의 복수형이며, ‘이쉬=사람’와 연계되어 ‘책망들의 사람’으로 직역됩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충분히 깨달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견책과 책망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목이 곧은’이란 대목은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고약하고 못된 짐승이 멍에를 지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책망과 경고를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완악함과 교만함을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인의 자세를 연상케 합니다. 일찍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불순종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출32:9)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후단은 이처럼 책망을 귀담아듣지 않는 패역한 악인의 비참한 운명을 다루는데, 그들에 대한 멸망은 ‘갑자기’ 닥쳐오나 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솔로몬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을 나타내는 ‘페타으= 눈을 뜨다’라는 부사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잇솨베르’를 함께 사용하여. 악인이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심판이 도래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릇이 한번 깨어져 산산조각 나면 다시 복구할 수 없듯이 악인도 홀연히 닥치는 심판을 받고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죽음도 그렇지만, 죽자마자 들이닥치는 영원한 심판은 본 잠언의 가장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

잠언29:2절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본 구절은 28:12, 28과 동일한 내용이며, 의인과 악인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대조합니다. 전단의 ‘의인이 많아지면’은 후단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이라는 표현에 비추어, 숫자의 증가 보다는 ‘의인이 권세를 잡거나 뜻이 관철되는 상황’을 말합니다. 의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즐거워하는 이유는 의인 자신의 삶도 모범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와 정의로 공동체를 이끌게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탄식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내릴 어리석은 결정이나, 착취가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 의와 지혜, 악과 미련함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국가를 번영으로 이끌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에서도 드러나듯이 완전한 의인과 지혜자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다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일 뿐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

잠언29:3절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


2절이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의인과 악인의 영향력을 관찰하였다면, 이 구절은 개인적 차원에서 양자를 묘사합니다. 전단에서 ‘지혜를 사모한다’는 말은 주님을 경외하며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1:7). 그는 지혜자로서, 잠언은 부귀와 장수가 있다고 하니(3:16), 부모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는다’ 하였는데, 재물은 물론 인생 자체를 낭비하고 귀한 생명조차 빼앗깁니다. 방종한 삶에는 늘 병이 따라 다니고 그 결과 단명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6:26)고 엄히 경고합니다. 한편, 좀 더 넓게 보면 창기는 사단의 지배 하의 음란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눅15:11-32). 그는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받아 멀리 타국으로 가서 창기와 함께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인생의 바닥에 떨어지자 아버지 집이 생각나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자 달려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나,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그리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하며 즐거워 하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이를 깨달은 인간의 반응에 대한 아름다운 글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마음에 품으면, 사이가 소원한 사람들을 사랑해 줄 수 있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매일묵상(2024/1/22-26)


(기도, 응답, 그리고 믿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빌립보 교회는 AD51년 경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 세워졌고, 자주옷감 장사 루디아와 그 가족, 점치는 귀신에게서 놓여난 여종, 그리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이 교인이었고, 목사는 의원 누가였습니다. 8년 후 사도 바울이 가이샤라 감옥(가택연금)에 있을 때 선교물품을 보내준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감사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그들도 여러 걱정 근심이 많았기 때문에, 사도는 감사의 태도를 갖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걱정 근심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화가 응답으로 오니 염려말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심을 믿어야 합니다(히11:6). 그때 우리 마음은 평화를 누리고 걱정 근심에서 놓여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훈현 9단과 창하호 9단이 둔 6회 삼성화재배 결승 제3국으로 기억됩니다(2001년). 창9단이 조9단의 대마를 포위하여 사는 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기사들이 걱정할 때, 조9단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한 집을 더 만들고 승리하였습니다. 조9단은 그 한 집을 이미 70 수 전에 보아두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70수 동안 조9단이 계산한 그 길을 한 수도 틀리지 않고 진행한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뢰가 그렇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겨내지 못할 상황은 없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사랑(관용)을 베풀 힘의 근거를 갖습니다. 진실로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십니다(시46: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잠언28:12절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

잠언28:12-28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이며 12절과 28절은같은 내용으로, 본 단락의 서론과 결론입니다. 본문은 13-18절(주님과 통치자), 19-24절(수고하는자, 약삭빠른 자와 재물), 25-27절(주님을 신뢰하는 관대한 자, 인색한 자와 재물)의 3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잠언이 가르치는 지혜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잠1:8). 지혜자는 그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준행하고,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그것을 버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한편,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인 율법의 준행 여부입니다. 그렇다면, ‘의로움’과 ‘악함’은 각각 지혜와 미련함의 윤리적 측면을 드러냅니다. 전단에서, ‘의인이 득의(得意)한다’는 것은, 의인이 바라는 통치가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자로서, 이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국가는 번영하고 백성들은 행복을 누리며, 열방 가운데서도 영광을 얻게 됩니다. 열왕기와 역대 기자는 다윗, 솔로몬, 여호사밧, 히스기야 시대의 통치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후단은, 하나님의 율법에 ‘귀를 돌려 듣지 않는’ 어리석은 악인이 권력을 잡아 학정을 하는 시대를 말하며, 므낫세의 55년 통치가 그 예입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선지자 이사야를 포함하여 무죄한 자를 또한 많이 죽였습니다. 공동체의 번영 없이 개인의 번영은 없습니다. 이번 22대 국회의원 선거(4/10)에서 도덕성과 능력을 갖춘 분들이 뽑히도록 기도하면서 투표해야 할 것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잠11:10)

잠언28:13절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에서 ‘죄를 자복한다’는 표현이 유일하게 등장하는 12절은, 하나님의 자비와 참된 회개를 요청합니다. ‘악한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 일터, 그리고 일상의 삶을 망가트리는 매우 어리석은 짓입니다. 만약 악함이 공공연히 드러날 경우는 물론, 은밀히 행해지더라도 결국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런 운명을 역전시키려면, 자신의 악을 고백하고 악한 행동을 버렸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과 공동체의 자비와 동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웃의 허물은 덮어줄 수 있지만, 자신의 죄를 덮지는 못하고 다만 숨길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고백 같이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깨닫고 고백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시편19:12).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비판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비판을 듣고 잘못을 인정한 뒤, 행동을 고칠 수 있다면 그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다윗과 삭개오가 그렇습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와의 간음을 은폐하려고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일년이나 숨겼으나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자 인정하고 통곡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요 부자였으나, 주님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비난을 받자, 즉시 회개하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들은 4배로 갚겠다고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약속하였습니다. 교부 알렉산드리아 클레멘트에 따르면, 훗날 그는 전 재산을 나누어주었고, 가이샤라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잠언28:14절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

‘경외’로 번역된 원문은 두려움과 공포로 떤다는 의미를 갖는데, 전단을 직역하면, ‘늘 두려워 떠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모순어법이죠! 우리는 언제나 스트레스 없는 삶을 열망하는데, 어떻게 ‘늘 두려워 떠는 자가 복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항상 깨어 대비토록 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 하거나, 또는 화가 닥쳐도 그 피해를  최소한에 그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그 반대입니다. ‘완악하게 한다’는 원어는 ‘마크쉐’로서,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할 때 보여주는 가혹한 태도를 지칭합니다, 소가 목에 힘을 주고 일하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모습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굳어 있으면 새로운 방법이나, 개선책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비록 개선책이 나와도 반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재앙을 당하고야 정신차리게 됩니다. 좋은 예가 모세를 통해 시현되는 하나님의 재앙들을 친히 겪어 보고도 마음이 굳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보내려고 하지 않는 바로의 모습입니다. 바로는 자신의 아들을 포함하여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잠언의 취지는 주님을 두려워(경외)하여 악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는 자는 죄를 멀리하고 따라서 벌도 없기 때문에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실로 경건한 두려움과 참된 행복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대조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굳어 있는 자는 재앙을 늘 두려워 하여 자기를 지킬 우상을 만드나 소용 없습니다. 늦어도 마지막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언28:1).

시편23편, 관계의 축복(1) – 목자되신 주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시편23편은 다윗의 시로서, 하나님과 시인과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에 비유되어 있고, 출애굽사건과 광야의 경험, 그리고 영원의 삶까지 노래합니다. 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집니다 : (가) 양과 목자(1-3절)-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 (나)여행자와 동반자(4절)- 인생의 길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다) 손님과 연회의 주인(5,6절) – 언제나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 사울의 집요한 추적, 피를 보지 않고 통일하고자 7년의 인내, 주변 국가들과 끊임 없는 전쟁, 압살롬의 반란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다윗은 본 시를 통해 감사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고난 속의 노래, 밤의 노래는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하여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입니다. 인생의 밤이 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생만 놓고 보면 이 시와 그리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부하를 죽이고 그 부인을 빼앗았으며, 가정을 파탄에 몰고 간 사람이며 결국 사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편 6절은 ‘살리로다’라고 통상 번역되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그 집에 돌아갈 것입니다’는 의미입니다. 즉 땅의 ‘길’, ‘골짜기’, ‘위협’이 끝날 때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진정 귀환할 것입니다. 모두 죽었는데 어떻게 영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암시한다 하겠습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은 모든 자들이 갖는 축복입니다.”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매일묵상(2024/1/15-19)


시편105:18,19- 요셉과 하나님의 섭리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무고로 감옥에 갇혔으나, 계속 신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신실함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19절이 답을 줍니다. 요셉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사 ‘가나안 땅을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유산을 가졌습니다. 특히, 요셉은 하나님께서 증조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00년 동안 그들을 섬길 것이나….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는 말씀을 간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유산과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믿음과 소망을 갖고 요셉은 늘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습니다.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믿음의 태도는 이것입니다. 재미 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어떤 여대생이 어머니와 함께 용하다는 점쟁이로부터 영부인이 될 관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그 여대생은 미팅조차 삼갈 정도로 삶의 자세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내며, 그렇게 인내하는 동안 성품은 온전하게 되고, 겸손이 몸에 밸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은사를 주시므로, 내게 도착된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죄수생활 동안 ‘꿈 해몽능력’을 받아 죄수에서 총리로 수직상승할 수 있었으나, 파라오 앞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린 모습은 좋은 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8:9절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율법’의 중요성이 다시 강조됩니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이며, 모세율법이나 이를 토대로 한 현자와 부모의 가르침이 포함되며, 잠언의 교훈 역시 들어 있습니다(28:4, 7). ‘율법을 듣지 않는다’는 말은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불순종하는 자를 미워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않는 자’가 고난을 당해 부르짖는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본절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그의 종교적 선행(기도, 금식, 헌금 등)조차 하나님께 역겹다는 점과,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를 두지 않은 기도는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는 것이므로 응답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약4:3). 그러나, 불순종하던 자라도 회개하고 그분의 율법에 귀를 돌려 순종한다면, 그의 기도는 들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회개를 강조하는데,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그 백미입니다(눅15장). 탕자는 아버지 재물을 분배 받아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거지가 되자, 아버지께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요청하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돌아온 탕자는 가인과 틀립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으나 결코 뉘우치지 않았고 다만 처벌만을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벌을 면하자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 놋 땅으로 갔습니다, 가인에게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가인은 율법에서 귀를 돌렸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주님은 역겨운 일을 하는 사람은 미워하시고, 바른길을 걷는 사람과는 늘 사귐을 가지신다.”(잠3:32,새번역)

잠언28:10절
“정직한 사람을 나쁜 길로 유인하는 사람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지지만, 흠 없이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새번역)

악한 자가 된다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지만, 정직한 자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것은 배나 더 나쁩니다(마23:15). 악인에게는 심판이 예정되어 있지만(마23:33),  ‘흠 없이 사는 사람’ 즉, 온전하고 슬기롭게 행동하는 자들은 오히려 악인이 원하는 좋은 것들(=복), 예를 들면 재물, 명예, 건강, 화목한 가정, 영생, 하나님과 바른 관계 등을 유산으로 받습니다. 그러면, 악인과 선인의 구별기준은 무엇이겠습까? 하나님의 말씀(계명)입니다. 선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서 논할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고, 여기에 온 율법과 선지자가 매달려 있습니다(마22:40). 한편, 정직한 자도 유혹 받지만, 만약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시119:11). 마귀의 시험을 받자 주님은 간직하였던 하나님의 말씀을 터잡아 이기신 것은 그 본보기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계명)은 신자의 가장 큰 재산이며, 그 재산을 우리 소유로 만들려면 밤이 필요하고, 그 밤에 주님을 생각하여 그분의 법도를 지키면 우리는 큰 영적 재산을 얻게 됩니다(시편119:55-57) 또, 주님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눅17:1)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선악분별이 힘든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길은 아예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편119:98)

잠언28:11절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본절은 “‘부’의 지배와 획득 시 ‘율법(=토라)’과의 관계”를 가르치는 단락(28:1-11)의 결론입니다. 잠언은 부를 긍정하며 가난보다 좋은 것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어느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18:11)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잠언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보다 더 소망 없는 자로 정의합니다(26:12). 따라서, 그 부자는 지혜(가르침)를 통해 고침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적습니다. 재물이 자부심과 결합될 때 재물의 긍정적인 가치가 사라지는 이상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 반면, 세상의 재물은 부족하여도 하늘의 지혜에 부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절은 그를 ‘가난해도 명철한 자’로 정의합니다. 그의 목적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 삶’(약3:18)이며, 그의 방법은 하나님의 진리와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교훈대로 행하는 것입니다(요8:31-32).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교만한 부자를 만나면, 하나님의 계시에 토대를 둔 도덕적 분별력으로 그를 살핍니다. 그때 그 부자의 이기적 동기와 이중 인격의 냄새가 나면,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스스로를 지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의 말씀은 즐거움이요, 천천금은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119:72,11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여 신실하게 살아가는 자와 교제를 나누어 지혜, 지식, 희락을 주시며, 부자가 모아 쌓은 재물을 넘겨주사 관리하게 하시고(전2:26), 영생을 그의 보상으로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믿음과 섭리)
하만에 의한 유대인 학살 음모가 시작되자 모르드개는 황후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행동을 촉구하였습니다. 에스더는 결단을 내려 금식 기도한 후,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 구원을 위해 나섰으며 주님은 에스더를 통해 유대인을 구원하였습니다. 이 역사적 구원의 경험이 부림절의 기원입니다. 요셉은 옥에서 나와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도록 애굽의 총리로 임명 되자, 비로서 만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300킬로 밖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버지 야곱을 찾지 않고 오직 총리 직에 몰두합니다. 8년 후, 흉년을 당한 형제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내려와 자신 앞에 절할 때 20년 전 꾼 꿈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섭리의 종착점을 깨닫습니다(창42:6-9). 이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의 시작이었습니다(창15:13-16).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한 섭리, 즉 ‘자신, 가족, 그리고 이웃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깨닫기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캘빈의 말입니다: “철학자들도 바울의 말(행17:28)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힘입어 기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바울이 찬송하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맛보아야만 그분의 아버지다운 사랑을 깨닫는데, 그 돌보심을 전혀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상권 239-40). 운명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선을 행하시기에 충분한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고 안식을 누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매일묵상(2024/1/8-12)

(고난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기도 하기에 눈앞의 결과에 흔들리지 말라는 교훈이자만, 만유를 통치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을 갖습니다. 17살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 갔을 때, 요셉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물론 절망과 원한 등으로 심히 괴로워 하였을 것이나,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기 전에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될 것이다’(창15:13,14)는 말씀 역시 간직하였습니다(시편105:17-19). 그는 애굽에서 93년을 살면서 그 말씀의 일부가 성취되었음을 확인하였고,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해골을 메고 나가라고 단단히 맹세시켰습니다(창50:24-26). 비록 요셉의 고난은 자신의 교만, 야곱의 편애라는 허물이 한 축을 이루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우리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불신자들보다 더욱 힘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왜?”란 질문 말입니다. 불신자들은 재수 없다라든지, 전생의 업보 등으로 합리화 하겠으나,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의문이 차 오르며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때, ‘자신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굳게 서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주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롬8:28)는 말씀과 함께, 요셉처럼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시험을 이길 지혜를 구하여 받을 수 있는 기도의 특권, 교회의 중보기도 및 위로가 있기에 든든합니다(약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8:15)

잠언28:6절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성실히 행하다’는 말은 ‘흠 없고 완전하다-blameless and whole)라는 의미이며, ‘굽게 행하다’의 원어는 ‘굽은 길을 가다’이지만, ‘두 마음을 품다 or 두 길을 가다’는 뜻도 내포합니다. 본절은 ‘성실하게 행하는 가난한 자’와 ‘굽게 행하는 부자’를 대비시켜, 불의로 가득 찬 이 땅에서는 두 마음을 품고 굽은 길을 가는 자도 부자가 될 수 있는 반면, 성실하게 일하며 흠 없이 완전한 길을 가지만 가난하게 살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잠언은 ‘부자’ 혹은 ‘재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10:15;14:20;19:7). 다만, 이 ‘재물’이 불의나, 교만과 관련되었다면 질타를 받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도덕과 재물이 서로 배타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무엇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잠언은 아무리 ‘부’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에는 비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올바른 삶’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가난’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에, 본절은 ‘나으니라-better’로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부자’는 ‘올바르고 성실하지만 가난한 자’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도 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시영 선생은 수 조원이 되는 토지를 팔아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설립한 뒤 일생을 가난하게 산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 길을 보고 선택한 사람은 비상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잠언28:7절
“슬기로운 아들은 율법을 지키지만,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아들은 아버지에게 욕을 돌린다”(새번역)

자녀가 슬기로운지 여부는 그들의 행동의 효과, 특히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아야 합니다. ‘율법’의 원어는 ‘토라’이며, 모세율법이나 그것을 토대로 한 현자나 아버지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본절은 4절의 교훈과 함께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에 따르면, 율법에 대한 태도가 사람들을 평가하고 친구를 선택 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아들은 나쁜 친구를 선택하며, 부모를 욕되게 하고 가족의 결속을 깨뜨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7), 하나님은 그의 기도조차 역겨워 하실정도로 관계가 틀어집니다(9) . 이와 같이 율법은 친구 선택, 가족과 하나님과의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도자이므로,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는 시편 기자의 고백을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후단의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이란, ‘완악하고 패역하여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는 신명기21:18-21절을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모세율법은 그런 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규정하므로, 본절은 더나아가 ‘먹기를 탐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만 해도 정죄받는다’란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어느 저명 인사의 가정은 모두 교회를 다녔지만, 주님의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사건으로 가정은 파탄났고 그 자녀는 마음 둘 곳이 없어 금지된 약물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정치생명이 끝난 것은 작은 일입니다. 아직도 그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잠언28:8절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

잠언에서 재물은 좋은 것이며, 종종 지혜와 하나님의 축복의 표지로 생각되지만(3:9-10;10:15,22), 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는 몇몇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재물을 축적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불법적인 방법 중 하나가 돈이나 곡식을 빌려주고 중한 이자- 30%에 달함-를 받는 것입니다. 모세율법은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부과할 수 있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이자 자체를 금지하였습니다(출22:25;신23:20). 그러나 이 규정에 위반하여 가난한 동족에게 중한 이자를 부과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느5:7,8). 모세율법은 법을 집행하는 구체적인 기관이 없이 다만, ‘하지 말라’는 규정만 두지만, 집행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이거나 하나님입니다. 본 잠언은 이자 금지 규정을 위반한 자는 재물을 빼앗겨서 가난한 자를 친절히 대한 누군가에게 주어짐을 교훈하는데. 그 배후는 하나님이고, 그분의 방법은 섭리이며, 섭리의 매개자는 하나님이 부를 위탁하실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본절은 가난한 자에게 관대함을 강조하는 잠언의 여타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11:24;28:27). 그러나, 만약 사업을 위해 이자를 지급하기로 약정하고 자본을 빌리는 경우는 허용되었을까요? 당연히 허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리를 취하지 말라는 전제는 가난한 자들의 궁핍한 상황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랍비 힐렐은 사업을 위한 경우 모세율법에서 정한 규정의 예외라고 해석하여 이자를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언13:22).

(요셉과 하나님의 섭리)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편105:16,17)

하나님은 기근이 발생하기 20년 전에, 4가지 목적을 위해 요셉을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보내셨습니다. 첫째, 닥칠 기근에서 아버지 집안을 구원하기 위해. 둘째, 그 당시 전 세계를 상징하는 근동지역의 모든 백성들의 삶을 보존시키기 위해. 셋째, 구속사적 측면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신다”는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넷째, 영원의 차원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 사건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형체로 오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는데, 실로 요셉의 일생은 그 모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 드러내는 신구약 성경을 가진 우리와 달리, 정작 당사자 요셉은 불행의 이유나, 섭리 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기약 없는 종살이였지만, 하나님은 범사에 형통케 하시고, 요셉은 보디발을 성실히 섬겨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자들도 요셉과 같이 타인의 인정을 받는데, 이는 그들이 주님의 신실하심을 본받아 살며, 부활의 소망과, 주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책임감 있게 노예생활을 하자, 하나님은 요셉 때문에 주인 보디발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음을 성경은 거듭 언급합니다. 고난을 통과할 때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고난이 끝나는 때는 모르지만, 흰개미가 결국 4미터의 집을 지어내듯이, 주님께서 이 모든 조각을 모아 원하시는 집을 지어가시는 도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안식하십시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매일묵상(2024/1/2-5)


로마서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1509-1564)의 신학은 사도 바울의 “섭리와 은총”에 기반합니다. 칼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고, 오로지 부친의 뜻을 따라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그가 배운 신학과 법학은 언어와 변론 능력을 향상시켰고, 법철학은 판단력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을 주었습니다. 부친이 죽자(1531)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습득 및 많은 고전을 섭렵하면서 고전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섭리적 준비를 거친 칼빈은 탁월한 라틴어 문장가요, 엄격한 성서주의자인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자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는 30년 뒤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자신의 일생이 부친이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간 것처럼 보이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칼빈은 자신이 종교개혁에 뛰어든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고백합니다. 칼빈은 성격이 수줍고 소심하였기에, 은거하여 늘 혼자 연구하려고 하였으나, 격동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 속에서 파렐이나 마르틴 부처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그의 은사– 『기독교 강요』, 교부들에 대한 탁월한 학문적 능력 등- 를 보고 대중 앞으로 불러내었고, 그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제네바에서 개혁교회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많은 고난이 예상되었음에도, 칼빈은 그런 부르심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여 개혁신학과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칼빈의 삶이 말하듯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인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으로 이끄신다’는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영적 지혜입니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막4:27)


잠언28:4절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본 잠언은 율법을 기준으로 사람을 두 영적 범주로 분류합니다: ‘율법을 버린 자’와 ‘율법을 지키는 자.’ 그들의 각각의 특징은 악인을 ‘칭찬는 자’와 ‘대적하는 자’입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분짓는 선(線)은 인종, 정치적 성향, 종교적 믿음도 아니고 오직 영적 특성이며,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성품으로부터 악인들 대적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에 악인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은 ‘토라’의 번역으로 모세율법을 지칭하나, 통상 확대되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말씀, 교훈 등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모세율법의 정신에 충실한 부모나 현자의 교훈은 모두 본절의 ‘율법’에 포함됩니다. ‘악인을 칭찬하다’는 말은, 국가와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악인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혹은 그들의 행동에 동참함을, 혹은 악을 사랑하는 태도를 의미하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영적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단의 ‘악인을 대적한다’는 표현은 악인의 악을 분별하여 미워할 뿐 아니라, 그 악을 제거하여 주님의 공의를 세우려는 한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8장은 사람을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구분하여, 전자는 오로지 육신에 속한 것(육신=자기 중심의 사람을 의미)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인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롬8:5-8). 그들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을 가진 자는 누구나 주님의 계명에 삶의 주소를 두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잠언28:5절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여호와’란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은 창조주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주권자인 국민을 떠나서는 정치를 논하지 못하는 것처럼, 만유의 통치자인 주님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면 심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더구나, 주님께 반역하는 악인의 경우 무엇이 정의(미스파트)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합니다. ‘정의’는 ‘미스파트’의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미스파트’는 ‘정의’ ‘판결’ 혹은 ‘소중한 것’을 의미하고, 삶의 옳고 그름과 가치관의 선악을 판단할 기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배제된다면 정의나 가치관을 판단할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잠언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 임을 가르치며, 이 가르침을 따라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뜻을 찾는다면 선악의 문제를 분명히 깨닫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후단의  ‘모든 것’에는, 가난하고 힘 없는 자를 구제해주고, 압제자를 벌주는 등 공동체를 회복시킬 적절한 시기와 방법이 포함됩니다. ‘여호와(주님)를 찾는 자’는 그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며, 주님께 보상을 받습니다. 느헤미야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1600km 떨어진 수산성에서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백성들은 고난 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하나님께 자신을 총독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기도드렸고, 그 응답으로 적법절차를 밟아 유대총독으로 부임하여 즉시 성을 중건하고, 모세율법에 따른 바른 예배를 확립하였습니다. 12년 이상 총독의 녹도 받지 않은 느헤미야에게 주님은 마지막날 생명의 부활로 보상하실 것입니다.“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섭리, 성경, 그리고 믿음
“아프리카 초원의 버섯흰개미들은 4미터 이상의 높이에 복잡한 내부 구조를 가진 탑 모양 둥지를 만들어 거기서 수백만 마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습도를 조절하는 환기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새끼들을 기르는 육아실과 소화를 돕는 균류(흰개미버섯)를 재배하는 넓은 방들도 따로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이 개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단지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에 기초한 10개 내외의 빈약한 소통 수단만으로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해낸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즉 흰개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4미터 넘는 거대한 탑 모양의 둥지를 건설할 목적의 노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다만, 본능적 욕망이 만든 몇 가지 단순한 규칙을 따라 맹목적으로 움직여서 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흰개미의 산출물인 4미터의 탑은 우연이나, 지성의 측면에서 보면 필연입니다”(김용규, 신, 482). 한 쪽은 우연, 다른 쪽은 필연이란 말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섭리도 같습니다. 섭리신앙이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삶의 결과를 맡기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러 고난이 존재하고, 이러저러한 두려움과 미래의 불안은 사람으로 고뇌하며 살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과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역사의 주님으로 숨어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 섭리, 선하신 목적 등을 증언하는데, 그 어떤 책에도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 하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통치를 믿음으로 담대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3,000년 전 다윗 시의 일부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