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16-17을 강해하는 중 존스토트 목사님은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라고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않고 (롬4:19) 도리어 강하여졌습니다 (롬4:20). 어떻게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따르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용함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거나, 우리가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것을 믿으려고 몸을 배배꼬면서 몸부림치거나, 우리의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기 위해 어둠 속에서 휘슬을 부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믿음은 이치를 따지면서 하는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없는 믿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우리를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해 생각해야만 합니다. 믿음은 결코 그런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눈을 감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몸은 죽은 자와 다름없었습니다. 또 사라의 사정 역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 역시 죽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절). 이를 좀 더 낫게 말하면 아브라함은 그와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으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숙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숙고하였던 것입니다(17). 그리고는 이런 약속들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였을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움추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충분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4:21).
제자도는 바로 이 갈림길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좁은 믿음의 길을 걸어갔으며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로보암 1세입니다 (열상 11-12장 특히 열상12:26). 그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10지파를 주겠으며 당신의 법도를 지키고 다윗과 같이 신실하면 그 왕위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정치인으로서 가장 큰 약점이 공격받았을 때 그는 그만 그 약점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북이스라엘 왕국에는 예루살렘이 속하여 있지를 않아 자신의 백성들이 절기때면 남왕국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고 결국 백성들이 배반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 금송아지를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또한 레위지파에서 제사장을 뽑지도 않고 절기도 자기마음대로 정한 8월 15일로 하여 유대의 절기와 비슷하게 함으로써 북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 되었고 20년 뒤 그 가문은 멸망당하였습니다.
믿음은 생각하는 신뢰입니다. 미국에 시드니라는 앰프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 있었습니다. 회사가 200대의 앰프를 주문 받자 그는 이를 전부 생산하였으나 앰프가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와 직원들이 설계도부터 모든 것을 자세히 살펴도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분은 사무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는 예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에 2개의 특정전선을 서로 교차시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엔지니어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자 앰프가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200대 모두 잘 납품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엔지니어인 나보다 앰프를 더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갈림길에서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을 신뢰하십시요.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계보를 잇는 믿음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Marc Chagall – Abraham and Sara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