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C 매일큐티

제 9 계명 & 제 10 계명 (2016.1.25~1.29)

2016.1.25
거짓 증언을 금하는 9계명은 진실한 증언에 대한 책임을 동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주장하셨으며,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혐오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신뢰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016.1.26
거짓 증언과 진실한 증언은 모두 혀에 달려 있습니다. 결국 이 계명은 선이나 악을 초래 할 수 있는, 인간의 혀가 지닌 엄청난 위력을 상기시켜 줍니다.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 하며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약 3:1-6). 비록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너무나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약3:8)는 사실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또한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1:26)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혀를 제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가 했던 기도를 쉬지 않고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울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제10계명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2016.1.27
마지막 계명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 계명을 통해서 십계명이 시민법에서 도덕법으로, 외적인 행위에 비중을 둔 법에서 내적인 경건에 관심을 둔 법으로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을 품었다고 해서 법정에 고소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욕은 행동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도둑질의 관계는 분노와 살인, 음욕과 간음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죄악, 심지어 범죄 행위로 발전할 성향이 다분하다는 사실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2016.1.28
이 계명은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통감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는 자신이 흠이 없다고 믿었으며 외적인 의에 비추어 볼 때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에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자전적 고백을 들으면 이와 같습니다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을 하고 “탐내지 말라” 고 한 율법의 10번째 계명을 접했을 때 그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몰랐다면 죄가 무엇인지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계명이 그의 마음 상태를 환히 보여 주는 바람에,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롬 7:7-12).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로마서 7장을 읽기를 권합니다.

 

2016.1.29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참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 이다 라고 말했습니다(엡5:5). 이 말씀은 탐욕이 인간에 대한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이상으로 그보다 더 크게 무엇인가를(혹은 누군가를) 갈망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그 무엇(누구)에게 내주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은 이기심입니다. 사실 이 계명은 소비 사회의 탐욕과,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냉소적인 무관심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는 만족입니다. 만족은 오늘날의 세계에서보다 신약 성경에서 더욱 강조되고 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히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