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시는 하나님: 계7:9-12
찬송가 가사에 “며칠후 며칠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곡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글인데 왜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이런 가사를 썼을까요? 이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이런 사고가 뒷받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시내산을 거쳐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려고 바란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 12명을 보내어 가나안 땅을 40일동안 탐지한 후 와서 10명이 가나안 백성들은 신장이 장대하다느니 우리는 도저히 들어가서 얻을 수 없다니 하는 악평을 하는 통에 이스라엘은 울부짖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 가자라고 하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그 후의 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을 우회하여 사해 동쪽을 지나 이제 요단강 동쪽 모압평지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진격하려니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요단강이었습니다. 이 요단강을 넘으면 바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간다는 의미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고 부른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편, 이 요단강은 봄철 추수때에는 항상 강뚝을 넘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한 강이었고 물살이 급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요단강에 막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3장에 따르면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셔서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서면 창일하던 요단의 물이 멈춰서리라 그러면 그때 백성들로 하여금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고 백성은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던 것입니다(수3:15-17).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첫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가지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멀리 우회하여 요단강을 건너게 하였을까요?
최소한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은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신자들에게는 절대적인 힘이 됩니다. 비록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감으로 약속의 땅 밖에서 체류하게 되었지만, 주님께서 이들을 큰 민족으로 만드시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내실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도 없었습니다 (창46:3-4).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면서 출애굽한 불순종의 세대가 전부 죽자 비로서 그 때가 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 앞에 다시 요단강이라는 물의 장벽이 나타났습니다. 또 한번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흐르던 강물은 저 멀리에서 무더기로 쌓이고 진흙투성이던 물 밑바닥은 금새 말라붙어서 홍해를 건너듯이 마른 땅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이런 두 개의 건넘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신다는 점을 늘 상 기억하도록 가견적 체험을 주셨던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수4:23). 이 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홍해로부터 시작되어 40년을 보냈던 것처럼, 요단강을 건넘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도록 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양자 모두 유월절을 전후한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은 유월절 후 얼마 안되어 발생된 사건이고, 요단강을 건너자 마자 유월절을 가나안 땅에서 보냈던 것입니다(출12:3; 수5:10). 또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과 연결되어 일어났다는 것 역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당신의 뜻을 보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출발을 하게 하심으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하시려는 의도이신 것입니다(수4:24). 셋째,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모두에게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단강을 건너는 유일한 방법은 물 속을 걷는 방법이고 물이 범람할 시기에는 이 지역의 물 깊이는 3미터 60센티미터에 달하고 빠르고 격렬한 격류가 동반되므로 이는 어린아이들 까지 생각하면 이루기 어려운 현실인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발들이 다시 땅을 밟자 끊어졌던 요단의 격류는 다시 흘러서 여전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수4:18).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런 난관을 돌파한 사실 그 자체는 엄청난 메시지를 피아에게 모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수4:23-24). 한편, 홍해를 건넌 사실은 주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대한 좋은 증거였지만 이는 가나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일어난 사건이었으며 세대 역시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경계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요단강 바닥에 있는 돌 12개를 날라 길갈에 유적지를 건축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항상 기억나게 하는 역사적 체험학습장을 만든 것입니다(수4:20-24). (A Visual Guide to Bible Events, 56-57 참조)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삶에는 하나님의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불평스럽고 불만족스러운 것들이 있어도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며 여러분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이 사건 역시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식 발음이고 이를 그리스어로 읽으면 예수가 됩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이끌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리는 신약의 성도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을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 요단강을 건너면 바로 천국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갈 수 없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죄의 담이며 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산출됩니다. 이것은 율법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으로 의롭고 선하지만 율법의 수명자인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욕망 중심으로 살려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의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과 사망을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서 33년간 사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로 가셔서 율법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모두 다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요단강과 같이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율법의 문제 죄의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망의 문제도 그의 부활로 이기셨고 때가 오면 우리 모두를 부활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은 그 피로 세우는 새언약을 하나님과 체결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우리 성도들을 이끌고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사 이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님을 따르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셨던 것입니다.
구원하심은 항상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의 어린양 곧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사진: Salvation Mountain, Niland CA (http://proof.nationalgeographic.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