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15. 07. 15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11:11-12)

1999년 7월 17일 자 기독공보를 보면 언더우드 탄생 140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 묻혔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유해를 83년만에 양화진 외인묘지로 옮겨 부인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 과 함께 합장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언더우드 목사님은 이미 1916년 미국에서 돌아가신 바 되었고 부인은 그 다음해 아들 원한경박사와 자부와 함께 한국으로 되돌아와서 선교사역 및 의료사역을 하다가 1921년 죽어 양화진 외인묘지에 따로 묻힌 바 되었습니다. 릴리아스 호튼 여사는 1851년 태어나 시카고에서 의사면허를 취득하고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1888년 37의 나이로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서 제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매우 가난하고 길은 진흙으로 덮인 한국을 보았지만 선교사로서의 그녀의 가슴은 부풀어 올랐다고 적고 있습니다(상투쟁이와 15년).한국에 와서 그녀는 두가지 일에 바빴습니다. 하나는 낯선 언어를 익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민비와 나이가 같았고 민비의 주치의였습니다. 서로 간에 친했다고 합니다. 1년 후 8살 연하인 언더우드 목사님과 결혼을 하여 1890년 외아들 원한경을 낳았습니다. 글도 잘쓰셔서 1904년 상투쟁이와 15년이라는 선교일화를 담은 책을 미국에서 출간하였고 1918년에는 언더우드 선교사 이야기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들은 지금도 아마존에서 구입가능합니다. 한국에서도 킨들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조선 선교에 발을 디뎠고 조선 사람들을 사랑하여 자신이 가진 의술을 가지고 섬기다가 이 땅에 온지 33년후에 70살인 1921년 조선에서 죽었고 양화진에 묻혀 지금도 우리에게 그녀의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응답되어 그녀의 남편이 세운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은 지금도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그녀의 후손들은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선교란 이런 것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c7cc5725_underwood이미지 출처: www.boazclu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