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3/31-4/4)


「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6절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태평양 전쟁(1941년) 이후 일제는 ‘천황숭배’를 강요하였습니다. 3.1운동 당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룬 선생 박연세는, 목사가 되어 시무한 교회에서 신사참배 동참을 참회하던 중, ‘천황숭배’에 직면하자 박해를 각오합니다. ‘지나사변 5주년 기념일’을 지키라는 총독부의 지시를 보고, 특별예배 때(1942.7.7) “성전(聖戰)이 아니라 약육강식일 뿐이다”고 선포하고, 주일예배 때(8/30)는 “육으로는 천황 폐하를 제일 존경할 수 있어도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일 존경의 대상이다.”는 설교를 하여, 천황을 ‘현인신’(顯人神)으로 만들려는 일본의 정책을 비판하였습니다. 교인 김동만, 전태균 등이 경찰당국에 알렸고 박연세 목사는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1942.11.10). 당시 18세였던 딸 박지영 권사는 “그날 저녁상을 받으시구 몇 숫갈 뜨지 않으셨는디, 형사 서너 명이 들어와 아버님과 함께 서재로 들어가시드만요. 그리곤 얼마 있다가 나오셔서 ‘한복 좀 가져오시오’ 하시드만 한복을 입으시구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직후 박연세 목사는 독방에서 ‘동사’(凍死)하였습니다(1944.2.15). 일제가 감방 마루 아래로 물을 흘려 보내 그 안에서 얼려죽였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슬퍼할 필요는 없으나, 주님의 길을 따른 그분의 믿음과 애국심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8). 

전도서2:24절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1:12-2:23절까지 하나님 없는 인생의 절대 허무와 절망감을 토로하나, 2:24-3:22절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허무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구체적으로, 2:24-26절은 일상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3:1-15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세를, 3:16-22절은 하나님의 심판과 신실한 삶을 교훈합니다. 본절 전단은 축복 받은 삶의 모습을 ‘먹고 마시며 수고한다’로 표현합니다. ‘먹고 마시며’는 평화로운 일상의 삶을, ‘수고한다’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를 통한 축복을 말합니다. 안락한 삶과 노동의 즐거움이란 표현은 1:12-2:23절에서 묘사된 비탄에 대한 부정입니다. 즉 인생의 매일이 괴로움이며 노동의 결과는 헛되고 그 자체는 큰 악이라고 소리친 전도자가 24절에 들어서서갑자기 긍정의 톤으로 바꾼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24절 후단에서 그 깨달음의 근거가 제시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을 바라보면 내재돼 있던 긍정적인 측면이 부상하면서, 삶에는 통일성이 부여되고,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솔로몬은 이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은혜 받은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저명한 곤충학자 최재천 박사는 인간을 단백질이 모여 만든 유기체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삶의 의미나 목적도 없이 살아간다고 하면서, 부인을 따라 교회에 나간지는 30년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간절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습니다만, 주님께 돌아가면 발견할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전도서2:25,26절
“25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26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24절은 최선의 삶은 일상의 책임을 다하는 중에 기쁨을 누리는 것이나, 이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25,26절은 하나님의 주권이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증언합니다. 먼저,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는 구절은 “그분 없이 누가 먹고 즐길 수 있느냐”로도 번역됩니다. 전자는 솔로몬 자신이 최상의 희락을 누렸음을 상기시키면서 다음의 진술(26)에 권위를 부여하고, 후자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합니다. 문맥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에 후자가 타당합니다. 26절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는지에 대한 솔로몬의 관찰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지혜, 지식, 희락’인데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짐을 깨달았다는 언급입니다. 잠언에서 ‘지혜, 지식, 희락’은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 그리고 기쁨이 근본을 형성합니다. 반면,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 죄인-에게는 ‘모으고 쌓는’ 힘든 일을 주시고, 그 재산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목적은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을 떠나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헛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고, 소망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그모스와 몰렉
열왕기하 3:27절
“그래서 모압 왕은, 자기를 대신하여 왕이 될 장자를 죽여, 성벽 위에서 번제로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크게 당황하여, 그 곳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새번역)


오늘 본문은 비씨 840년경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에 포위된 모압 왕 메사가 신 그모스에게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며, 암몬 신 몰렉(몰록)의 제사관습과 같습니다.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일까요? 학자들은 다투고 있습니다. 한 쪽은 구약성경은 그모스를 모압의 신으로, 몰렉을 암몬의 신으로 구별하여 부르므로 각각 다른 신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쪽은, 메사 석비에 등장하는 모압 임금 메사의 아버지의 이름은 ‘케모쉬 멜렉’이며, 이는 ‘그모스는 임금이다’ 혹은 ‘그모스는 몰렉이다’로 읽힐 수 있어 그모스와 몰렉은 같은 신이라는 주장입니다.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이같이 바른 성서 이해를 위해서도 고고학은 중요합니다. 그 석비는 메사가 전쟁 중에 여인들을 죽이지 않고 ‘아쉬타르-그모스’에게 헌정했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쉬타르-그모스’는 여신이며 아세라(=아쉬타르)로 부르는 바알의 배우자이지만(가나안 지경), 모압 땅에서는 최고의 신 그모스의 배우자로 보는데, 우상이란 모두 인간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따라서, 우상숭배는 철저히 인간적이나,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인간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은 저주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저주란, “철저히 하나님과 격리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사 하나님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으므로, 인간적인 모든 상상을 접고 주님의 계시를 붙잡아야 합니다.“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신명기1:36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전심 전력으로 나를 따랐으므로 나는 그가 밟은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주겠다.”(현대인의성경)
갈렙은 40년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 전쟁 5년 동안 이 말씀을 간직하다가, 유다지파의 땅이 제비뽑기로 확정되자, 가장 정복하기 힘든 요새 헤브론(920미터)을 요구하였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주님께 순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을 차지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85세의 갈렙은 왜 헤브론을 원했을까요? 2개가 떠오릅니다. (1)역사와 전통적 측면: 헤브론(‘연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미 700년 전 갈대아 우르에서 온 아브라함의 삶의 터전이었고,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 등 조상들의 매장지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조상들이 이방인이었지만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200년을 살아간 유서깊은 지역이었습니다. (2) 유다지파 화근의 제거(수14:15): 아낙자손은 거인 중에도 가장 키가 큰 자들로서, 45년 전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두려워 한 그 거인들이었습니다. 유다지파 존속에 관하여 큰 위협 요인이라, 만약 이들을 쫓아낸다면 유다지파의 땅을 보호하며, 자신의 후손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지파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함께 여호수아 앞으로 나갔습니다. 갈렙은 45년 전 정탐꾼일 때나 85세의 지금이나 장군으로서 섬길 자리를 찾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다지파를 위하여 가장 힘든 일을 맡아 완수해 낼 책임으로 해석한 그 믿음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2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