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요한복음13: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목포 양동교회의 저항과 수난 전통은 일제말기 박세연 목사님의 투옥과 순교로 이어집니다. 박목사님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군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른 바 있습니다. 출소 후 박연세 교사는 평양신학교에 입학·졸업하였고,이리 등에서 목회하다가 1926년 양동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10년 간 교회는 부흥하여, 죽동교회(1927년), 연동교회(1928년), 온금동교회(1929년), 중앙교회(1933년) 등이 분립 개척되었습니다. 일제말기가 다가오면서 후반 5년의 목회는 갈등과 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 전남노회장으로 참석하여 “본 노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정신 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무인 동시에 교회지도상 선명한 태도인 줄 알고 이를 결의 실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지하여…”라고 ‘양심과 배치된’ 보고서를 제출,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동조하였습니다. 만약 여기서 끝났다면, ‘훼절한 민족주의자’와 ‘양심에 꺼림이 있는 목사’의 오명만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에 이어 ‘천황숭배’를 강요하자, 조선독립을 바라는 민족주의자이며, 예수만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박연세 목사님은 주님과 교회에 인정 받을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집니다. 우리도 시험에 실패하였다고 좌절하면 안됩니다. 주님이 또 한 번의 테스트를 보내실 때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이겨나가면 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2).
전도서 2:22절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전도자는 18-21절에서 죽음 때문에 자신의 모든 수고의 결과를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수고 하지 않은 자에게 무조건 넘겨주어야 하는 삶의 부조리를 탄식합니다. 22-23절은 혹시라도 노동의 과정이나 삶의 과정이 주는 기쁨과 열매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의미가 있다는 질문에 답합니다. “무슨 소득이 있으랴?”의 직역은 “그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아무 것도 없다” 입니다.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란 그 수고가 단지 육체에 한정되지 않고, 마음의 고통도 수반함을 뜻합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자신의 분야에 어느 정도라도 성과를 내려면 심혈(心血)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생에 대충 대충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업적은커녕 최선을 다해도 생존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니 곧 패가망신입니다(잠18:9). 전도자의 삶은 달랐습니다. 지혜자인 그는 최선을 다해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죽음이 임박하자 업적에 지나치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온 자신의 잘못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권력자와 부자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노력과 지혜 그리고 업적을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절대 강자의 도구이며 의지의 표현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때 삶의 의미와 영생 모두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
전도서2:23절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원문은 이유 접속사 ‘키’를 도입하여, 22절의 수사적 질문과 암묵적 답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일평생’이란 ‘그의 모든 날’의 의역이며, ‘근심하며’는 속상하여 식음을 전폐한 한나와 같은 극심한 감정적 동요를 묘사합니다. 지금 전도자는 사람의 매일이 고통스럽고 일은 괴롭다는데, 부귀영화를 누리는 왕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통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와도 여러 가지 걱정 근심, 재물에 대한 집착 등으로 마음에 쉼이 없으니, ‘아, 이것도 헛됩니다!’ 솔로몬이 이처럼 허무의 고백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난 순간 그의 인생관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은 그의 아들 솔로몬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우리야 사건이외에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고, 자신의 인생관을 바른 믿음 위에 세웠기에 후회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39:7). 따라서, 동일하게 수고하며 일생을 살아가도 허무하다고 외치는 솔로몬과 주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간 다윗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과 성공 그 자체만 바라 보는 삶은, 그 모든 것을 얻어도 그림자를 붙잡는 것처럼 허무하지만(죽으면 모든 것이 타인의 소유임), 주님을 믿고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살아가면 점점 소망과 확신에 차게 됩니다. 실로 주님의 뜻을 행하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신 그모스
신명기5:9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모압은 다윗에게 정복 당한 후 조공을 바치다가(150년 간) 왕 메사 때 벗어나지만, 모압의 문화와 신 그모스는 이스라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솔로몬은 모압 여인을 취하였고, 예루살렘 동쪽 어느 산봉우리(멸망산)에 그모스 신전을 세워주었습니다. 이 신전은 요시야 왕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300년 동안 존속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모스에게 제사 드린 장소입니다(왕하23:13). 가나안의 신 그모스는 주전2500-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에블라 문서에 가미스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주전1400)와 예레미야서(주전600)에도 계속 등장하는 모압의 주요 신입니다(민21:29; 렘48:7,13). 성경은 모압을 그모스의 백성이라 부르지만(렘48:46), 그모스란 이름의 어원은 물론, 그 모습이나 종교적 역할도 어둠에 싸여 있습니다. 다만, 모압 땅에서 출토된 메사 석비가 그모스 신이 전쟁에 관여함을 보여주는데, 열왕기 3장 사건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은 제2계명(우상숭배금지)을 어긴 자에 대한 형벌을 말합니다. 우리의 우상이 멸망산에 있는 그모스처럼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벌이 집행될 것입니다. 속히 쳐부수어야 하지만 ‘탐심은 우상숭배다’(골3:5)라고 할 정도로 삶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우상을 인간의 힘으로 깨뜨리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직접 우리 우상-재산, 명예, 권력, 건강, 자녀, 지식 등-을 깨뜨리고 계심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
레위기18:3절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백성’은 출애굽의 목적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모세 율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도 그들 안에 하나님의 법이 없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던 백성의 삶은 모세율법을 받고 크게 달라집니다. 먼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의 왕입니다. 1년의 삶은 농축수 산업과 함께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 등 하나님께 대한 예배 중심입니다. 결혼은 4촌이 넘어야만 가능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고, 모세의 부모는 고모와 조카 사이 였으나 근친혼은 금지되고 친척구제를 위해 고엘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도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임명하셨으니, ‘모세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6:2). 그리스도의 법이란, 일부일처 제도, 원칙적인 이혼금지, 정당한 정부의 권위에 순종 등 일반적인 명령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섬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실천하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성취함으로, 모세 율법을 완성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각 신자와 교회를 가르치시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27권)은 주님의 뜻이 상세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기는 침례교인들은 “그 책의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