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도7:21절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1900년대 초, 가난한 목포 교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장로와 한국인 목사를 세우고, 1백여 평 예배당을 마련한 데는 뜨거운 신앙과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독립 의지가 깃들어 있습니다. 증거는 예배당 서쪽 출입문입니다. 서쪽 출입문은 남자 교인들을 위한 문으로, 문 위쪽 반원형 아치 조각돌에는 행서체 한문 글씨로 “大韓隆熙四年(대한융희4년)”와 같이, ‘隆’자와 ‘熙’자 사이에 한말에 유행했던 좌우대칭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덕주 교수는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해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안내하시는 목사님은 “그게 저도 신기합니다. 아마 지금은 뽑아낸 큰 등나무에 글씨가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하는데, 사람들의 출입이 많았던 동쪽 출입문(여자교인들용)은 같은 형태이지만 “쥬강성일쳔구백십년”이란 아홉 글자만 새겨져 있지 태극 문양은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말은 타당해 보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한 때는 1910년으로, 그 해부터 한일합병으로 인한 일제의 무단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돌에 새긴 ‘大韓’글씨와 태극 문양에 담긴 ‘독립 정신’의 의미는 더욱 크다 하겠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유산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독립정신입니다. 전자는 죄와 마귀의 지배를 이기는 능력이고, 후자는 일제의 지배를 극복하게 한 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지만, 현실에서 합법적으로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7:23)
전도서2:17절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본절은 지혜자도 죽음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괴로움을 토로합니다. 지혜를 얻으려면 지성은 물론 엄청난 노력과 끈기가 필요하나, 그런 노력 끝에 지혜자가 되었어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선악과를 따 먹고 지혜를 얻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스스로 영생하려는 인간에게 내리신 철퇴입니다. 전단은 전도자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싫어한다는 내용입니다. 후단은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지혜와 업적을 오는 세대가 기억하지 못함을 직시하자, 모든 이생의 자랑이 괴로움으로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지푸스 신화의 시지푸스가 받은 괴로움 같습니다. 시지푸스의 일은 돌을 밀어 산 꼭대기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올려 놓은 돌은 굴러 떨어져 다시 올려야만 하니, 시지푸스의 괴로움은 영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을 상징하나,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는 시지푸스와 다릅니다. 문제는, 죽은 다음에 오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전도서에는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하여 분명한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12:14)는 구절을 통해 사후 심판의 진리를 인식했다고 생각되기에, 세상과는 다른 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부인하는 세상이나 금생의 무의미를 탄식하는 전도자와 달리, 심판날에 있을 우리 행위에 대한 주님의 판단을 염려합니다. 따라서, 심판의 진리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은 축복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눅11:28,새번역)
전도서2:18절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본절에서 전도자는 상속자에게 모두 넘어가고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못하는 죽음을 생각해 보자자신의 모든 수고와 업적을 미워합니다. 잠언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5:2)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과 지혜를 창조세계에 숨기셨으므로, 인생이란 각자의 삶에 감추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45년 동안 활동한 개그맨 이경규 씨는 집에 들어 오면 모든 OTT를 흩어 보며 그날 방영한 예능 프로그램들을 흩어보며 흐름을 파악하고, 실패한 것들을 살펴 통찰력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는 그간의 경험을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이란 책에 담아 펴냈습니다. 아마, 개그맨으로 사는 동안 느낀 것들을 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이경규 씨는 예능의 관점에서 노력하여 돈도 벌었지만, 희극 보다 놀라운 삶의 희극을 많이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규씨는 그 깨달음과 함께 수고한 부를 그대로 남겨야만 합니다. 전도자 역시 왕의 권세와 지혜로 쌓은 부와 유산의 운명을 숙고한 후, 하나님이 주신 삶을 즐기고, 선을 행하라고 교훈합니다(전3:12,13). 지혜, 재물, 노력, 업적 등은 생전에는 유익이 있지만, 그 자체로는 오는 세상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다만 이들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베풀 때 가난한 자, 저는 자, 맹인, 몸 불편한 자를 청하라”(눅14:13)는 주님의 가르침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14:14).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모압 사람들」
신명기2: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모압의 영토는 사해 해변을 끼고(서쪽), 아르논 골짜기를 경계로 암몬과 나누고(북쪽), 세렛 시냇가를 사이에 두고 에돔과 대치하였습니다(남쪽). 모압에 관한 자료는 거의 구약 성경에 의존합니만, 디몬의 메사 석비는 성경 본문 이해(왕하 3장)에 매우 중요합니다. 모압 도시들의 이름은 이사야서에 여럿이 등장하나(사 15장, 16장), 디본과 헤스본이 대표적입니다. 디본은 모압 신 그모스의 신전이 있었고(사15:2), 헤스본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시혼으로부터 정복한 땅이지만 그 전에 모압의 소유였습니다. 모압어는 히브리어와 가장 유사하고, 모압과 이스라엘은 같은 혈통입니다. 이스라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가 모압 조상 롯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과 전쟁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받는데, 하나님은 당신을 모르는 모압 족속에게 아르 땅을 배정하셨기 때문입니다(신2:9).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재 물, 명예, 권력 등을 배정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직면하면 이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두려워 한 모압은 술사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다가 실패하고, 끝내 미디안 여자들을 이용하여 타락시키자 하나님은 염병으로 백성들을 치셨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남녀를 죽여 벌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시고(민25장), 그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약속하십니다(민25:13). 제자들의 삶이란 의로우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잠언16:7,새번역)
여호수아14:9절
“그래서 모세는 그 날 ‘네가 주 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으므로, 너의 발로 밟은 땅이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유산이 될 것이다’ 하고 맹세하였습니다.”(새번역)
38년 동안 노예의 정체성을 가졌던 갈렙은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자 거듭납니다. 야곱과 그 자손 70명이 애굽으로 내려간지 430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 속에만 존재하셨으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10가지 재앙과 유월절 예식, 홍해와 광야의 이적들을 베푸신 후,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현현하셨습니다. 갈렙은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였고 이후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는 ‘믿음의 정체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유다지파나 하나님께 모두 충성스러웠으며, 그의 믿음은 가나안 정탐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정탐 내용을 보고하면서 10명은 불신앙에 서지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전쟁하자고 외쳐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민14:24). 갈렙은 믿음의 삶, 즉 하나님의 약속에 터잡아 사는 비결을 터득하였습니다. 45년 뒤 85세의 갈렙은 “나는 모세로부터 제비뽑기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땅을 소유할 약속을 받았다. 이제 난공불락의 요새 헤브론을 배정해 달라”고 담대히 요청합니다(수14:9). 갈렙과 같은 ‘믿음의 정체성’은 주님의 인정을 받을 때 생겨 나며, ‘금생과 내생’에 보상이 따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든 것의 주님 되심을 배워가며, 이것이 영생의 핵심입니다(요17:3). 주일예배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방편입니다. 우리는 물론 자녀들의 예배참석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을 따라 살면 행운의 열쇠를 얻고 야훼를 믿고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잠언16:20,공동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