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6:1-2절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온 지 480년이 지나고 솔로몬이 왕이 된 지 4년째가 되는 해 2월에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성전 규모는 길이가 27미터, 폭이 9미터, 높이가 13.5미터였으며”(현대인의성경)
남장로회 선교부는 복음의 열매를 보고 목포 선교부를 존치시켰습니다(1907). 오웬 선교사가 별세하자 담임 목사 프레스톤은 광주로 전출되었고, 대신 군산에서 활동하던 해리슨이 내려 왔습니다(1909). 같은 해 한국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교인들이 목사 생활비를 전담한다는 의미에서 ‘자립’의 실천이며 호남 최초입니다. 목포 교인들의 ‘자립’ 신앙 열기는 새 예배당 건축으로 연결됩니다. 1898년 최초의 예배당(한옥) 9평은, 1903년 18평으로 늘렸지만, 5백명의 교인을 수용하기에는 좁았습니다. 더구나 그 한옥 예배당은 남자 교인만 예배드렸고 여자 교인들은 영흥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므로, ‘한 지붕 아래서 남녀가 함께’ 예배 드릴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리슨 선교사의 보고입니다. “많은 기도와 의논을 거쳐 교인들은 62×36피트짜리 석조 예배당을 짓기로 결의하였는데 이곳 가난한 교인들 형편으론 버거운 계획이었습니다….많은 여인들이 은가락지와 비녀를 빼서 바쳤고…” 1년 후 유달산 돌로 지어진 1백평의 예배당은 솔로몬의 성전(74평) 보다 더 크고, 제사장만 들어갔던 솔로몬의 성전과 달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벧전 2:5)
전도서2:15절
“혼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어리석은 자가 당한 일을 나도 당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얻은 유익이 무엇인가? 이것도 역시 헛된 것이다.”(현대인의성경)
솔로몬은 본절에서 자신에게도 닥칠 죽음의 숙명 앞에서 자신의 지혜의 유익이 무엇인지 따져봅니다. 먼저, 솔로몬은 인생의 길을 잘 헤쳐나갈 지혜를 소유한 자신도, 어리석은 자와 동일한 결과, 즉 죽음을 피할 지혜의 부족을 토로합니다. 죽음이 지혜자와 미련한 자를 동일하게 어리석다고 선언하는 것은, 둘 다 죽음을 이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무슨 유익을 주었겠습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이 세상에 속한 문제들을 제대로 처리하여 권세, 명예, 재산 등을 얻게 하는데는 능력이 있으나, 영생을 주지 못하고 명성과 업적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세속적 지혜는 결코 이 세상의 범주를 넘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은 무로 돌아가버리니, 세속적 지혜의 한계이며, ‘이것도 역시 헛되다’고 솔로몬은 탄식합니다. 세속의 지혜는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죽음을 오직 신체적 소멸현상만으로 이해하나, 그리스도인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신체적 죽음은 결정된 것이고, 이 세상도 없어질 것이나, 마지막 날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한 심판을 받음을 알고 있습니다.(히9:27). 그들은 사라져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명성과 업적을 남기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는 세상에서 주님께 칭찬 받을 생각으로 꽉 들어차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를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지혜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고전3:18,현대인의성경)
전도서2:16절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영원히 기억되지는 못할 것이며 언젠가는 다 잊혀지고 말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도 죽음에 있어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이다.”(현대인의성경)
15절에서는 죽음 앞에서는 지혜마저도 의미 없다는 전도자의 깊은 탄식은, 본절에서 더 깊이 증폭되어 지혜뿐만 아니라 모든 활동이 무의하여,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기억되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지혜자는 누구일까요?” 만유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죠! 16절의 전단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어, 15절의 내용, 즉 ‘죽음 앞에 지혜도 의미 없다’는 진술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죽어 다음 세대에게 둘다 잊혀지므로, 지혜도 의미없다는 뜻입니다. 후단은 전단의 내용을 재 진술하여,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려는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군사천재 케샤르,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책사 제갈공명, 정관의 치의 당태종, 서성 왕휘지, 연개소문, 태종 무열왕 등은 모두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들은 자기 시대에는 굉장하였으나 지금은 영향력도 없고 기억받지도 못합니다. 아마, 수십 억년이 지나 태양계조차 사라지면, 지구와 거기에서 인류가 쌓아올린 모든 문명은 잊혀지고, 그 후의 세대는 우주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부활의 나라가 도래할 때 누가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주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한 사람들 뿐입니다(요일2:17). 사랑 가운데 참된 것을 행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4:3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카르타고의 도벳
예레미야 7:31절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몰렉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도벳 사당이라 부르는데 , 유다 왕 요시야의 종교개혁(BC620)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도벳의 예가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도벳의 대표적인 모습과 자녀를 희생제물로 바치는 종교적 관습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카르타고는 주전 9세기경부터 베니게의 식민지였기에 가나안의 문화가 침투된 곳이며, 바알 함몬과 그의 배우자 타닛이 주신입니다. 카르타고의 공동묘지는 큰 고고학적 성과로서, 50년 간(1920-70) 발굴되었습니다. 공동묘지는 주전 8세기부터 로마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BC146넌) 사용되었고, 그리스의 문헌에 등장하는 카르타고의 종교적 관습을 확인시켰습니다. 무덤에는 영아 시신을 화장하여 담은 작고 붉은 항아리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희생제물로 아이들을 바쳤는데, 그리스 철학자들에 따르면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희생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따로 키웠다고 합니다. 전쟁과 같은 위급한 시기에 이렇게 키운 200명의 아이들이 바쳐지기도 하였으며 제사하는 동안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실제로 북이 연주되었습니다. 이방 카르타고는 별론으로 하고, 율법을 가진 유다백성들은 인신제사의 범죄를 왜 저질렀겠습니까? 두려움, 기근, 전쟁과 전염병 등의 절박한 사정을 아이들을 바쳐 신의 도움을 받으라는 귀신의 미혹 때문입니다. 정치, 경제, 군사를 포함한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의 진리를 믿는 자마다 자유함을 받습니다(요8:31,3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
히브리서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새번역)
정체성의 형성과정 중 ‘타인의 인정’이란 요소는 청소년기에 특히 중요합니다(인정철학).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티토가 어릴 때입니다. 복사로 신부를 도와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실수로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화를 내고 빰을 때리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는 말에, 티토(1892-1980)는 울며 성당을 나갔고,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카톨릭을 탄압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폴튼 쉰(1895-1979)은 동일한 실수를 하였지만, 신부는 부드럽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단다. 너는 언젠가 좋은 사제가 될 거야.’하며 위로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훌륭한 미국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칭찬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보물로 여기면 칭찬은 자연히 나옵니다. 어느 스님이 시주를 위해 한 집에 들어 가자, 그 집 어린 아들은 부모에게 매맞고 울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갑자기 그 아이 앞에서 절하고 일어난 뒤, 놀란 부모에게 “이 아이는 장차 정승이 될 것이니 소중히 잘 기르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부모는 아이를 귀히 여기고 양육하였고 후일 그는 정승이 되었습니다. 부모는 스님을 찾아 물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스님의 말입니다: ‘세상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귀히 여기면 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 알아맞추겠습니까?” 심리학자들은 남의 인정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중요한 믿음의 정체성 형성의 기회가 있는데, 신실한 믿음의 삶을 통해 받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히11:2,현대인의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