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랑을 실천한 목포·순천 이야기」- 이덕주
로마서16: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교회는 로마의 자생적 가정 교회 중 하나인데, 오순절,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의 전도를 듣고 믿은 자들이 로마로 돌아가 복음을 전파한 결과로 보여집니다. 목포 지역도 한국인의 자주적 선교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도착 전, 몇몇 목포 사람은 서울로부터 직접 복음을 받아들였고, 한국인 전도자 변창연은 선교기반을 닦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남장로회 선교부는 1896년 양동에 2,500평 땅의 구입을 시작으로 부지를 계속 넓혀 갔고, 1920년대에 이르면 양동 일대 1만4천여 평을 보유합니다. 양동 땅은 애들이 죽으면 몰래 와서 파묻는 ‘죽은 자의 땅’이라, 선교부는 헐값에 구입하여 언덕 꼭대기에 ‘양관(洋館)’을, 언덕 서쪽에 정명여학교를, 길 건너 서쪽으로 영흥학교(남자)를, 그 아래로 양동교회와 목사 사택을 지었습니다. 동쪽 길 건너 호남동 언덕엔 ‘프렌치병원’과 목포 고등성경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양동 언덕 일대의 ‘선교사촌’은 목포의 ‘치외법권 지역’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을 통해 ‘버려진 땅’이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물결을 타고 서구 근대화 문명이 목포 시내로 퍼져 나갔습니다. 복음은 쓸모 없어 버려진 목포 양동 땅을 생명과 근대 문명의 발원지로 변모시킨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인간 존재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1)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신분상의 변화와, (1)신자 안에 성령께서 오심으로 일어나는 인격 상의 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
전도서2:9절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9절은 솔로몬이 사업과 쾌락의 추구 결과를 요약합니다. 앞의 “창성하여”의 원어는 ‘위대하게 되다’를, 뒤의 ‘창성하니’의 원어는 ‘풍성케 되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솔로몬은 사업에서 크게 성공함으로, 부귀와 권세는 풍성하게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라는 표현은 세 번째 나오는데(1:16; 2:7), 솔로몬 자신의 사업적 성공을 강조합니다. 흔히, 성공을 맛보거나 쾌락에 탐익하면 삶의 중심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솔로몬은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는 표현을 통해 자신은 그런 종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말합니다. 솔로몬의 탐구는 창세기에 천지만물을 차근차근 만들어 내시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인생의 여러 즐거움, 웃음, 술 등으로 쾌락을 시험해 보았고, 집과 포도원을 세우고. 동산, 과원, 삼림을 만들고, 각종 과수와 나무를 심고 못을 파고, 가축을 많게 하고, 남녀 노비를 증가시키고, 노래하는 남녀와 수 많은 처첩 등을 두는 등 사업과 쾌락을 하나 하나 탐구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댜. 결론은, 크게 실망하여, 자신을 위해 한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바람을 잡는 것 같았다” 고백입니다. 그 반면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자 ‘심히 좋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마침표를 찍으셨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자아실현을 위한 실험정신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는 그의 결론은 소중히 간직되야 합니다. “내가 알기에, 살아 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전3:12,쉬운성경)
전도서2:10절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쾌락주의’(헤도니즘)는 개인의 즐거움과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는 철학입니다. 쾌락은 인간 본능에 속하여 인간이 무시하기는 어렵지만, 일시적 감정일 뿐입니다. 감정은 사라지면, 더 강렬한 자극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계속적인 쾌락의 삶은, 개인의 발전은 없고 육체적,정신적, 도덕적 타락을 가져올 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적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적 삶이므로, 쾌락 중심의 삶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지혜자 솔로몬은 결코 쾌락주의에만 몰두하지 않고, 자아성취까지 도모합니다. 쾌락과 즐거움은 오직 그의 삶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물질적 업적과 쾌락 추구 과정을 요약합니다. 그 과정에서 전도서는 끊임없이 전도자(솔로몬) 자신을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일인칭 대명사 ‘나’가 일곱 번이나 등장합니다. 전도자의 자아 의식인 ‘나’라는 자아 존중 사상이, 전도자의 삶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솔로몬에게 ‘주님을 경외하라’는 지혜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들’을 행하고(엡2:1-3),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쫓게 되자, 하나님의 뜻은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였던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중시하자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자가 되기 전에도 자신의 지혜를 우상화한 자였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롬1:22)
역대하12:13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르호보암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여인이더라”
다윗과 암몬 왕 나하스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을 모욕함으로 다윗과 전쟁하다가 패배하여 속국이 됩니다(삼상10:19).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윗은 전쟁과정에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러 주님 앞에 큰 죄를 범합니다. 충성스러운 장군 우리야의 가정을 파괴한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 받지만, 벌을 면제 받지는 못합니다. 주님의 벌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서 절정에 이르고, 다윗은 길르앗(암몬과 경계지역)으로 피신합니다. 이때 암몬 왕 나하스의 아들 소비의 도움을 받습니다. 암몬 족속과 다윗 가문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성경은 다윗의 모친에 대하여는 침묵하지만, 다윗의 조카 요압을 스루야의 아들로 소개하면서 단서를 제공합니다. 스루야와 다윗의 아버지는 나하스와 이새로서 서로 다르지만 어머니는 같은 이부동복의 관계입니다(삼하17:25; 역상2:16). 스루야의 부친 나하스가 죽자, 나하스의 아내가 이새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다윗으로 추정됩니다. ‘나하스’는 ‘뱀’이란 의미이고, 이미 암몬 왕들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기에 다윗의 모친이 암몬 여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다윗의 증조모가 모압 여인 룻이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입니다(룻4:22; 왕상11:1). 성경은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분의 교훈을 버릴 염려 때문에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하나, 때때로 순종하는 이방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셔서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자격을 갖추도록 섭리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
디모데전서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김상복 목사님은 「하나님이 꿈꾸신 가정」이란 책에서 “인간관계는 단 한 가지만 훈련되면 나머지는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라고 합니다. 그 한 가지란 무엇일까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입니다. 성경은 도처에 모범 사례가 증언되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신을 반역하여 멀리 떠난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세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체포되어 심문과 구타를 당하는 당신을 저주하면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뒤 제일 먼저 찾아가셨고, 사도의 사명까지 재차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은혜를 가슴에 담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또,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교회를 박해하는 원수 사울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고 하늘에서 당신을 보여주사 사울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은혜를 각인시켰습니다. 사울은 이름을 바울로 바꾸고 주님의 그 은혜를 갚으려고 목숨바쳐 주님을 섬겼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의 실행은 오직 은혜를 담은 그리스도인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놓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당신의 아들을 따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건,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훈련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는 명령은,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 그리고 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해야만 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