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5/1/6-10)


고린도전서15:26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엘리자베스 로스는 호스피스 의사입니다. 로스 의사는 몇 해 전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얼굴이 매우 밝아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중환자실에 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담당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어느 날 복도에서 청소하는 그 아주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 말을 들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이유를 몰랐으나, 3주 정도 지나 깨닫게 됩니다. 그 아주머니는 몇 해 전 여섯 아이 중 하나를 잃었습니다. 응급실로 가서 의사가 오기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폐렴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이 몹씨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 그들을 쓰다듬으면서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그것이 사랑이지요” 그러면서 로스는 사랑이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보아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로스는 비그리스도인입니다만, 호스피스 환자들과 같은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인간이 그 이상의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면 영생이 있음과 그 영생이 우리 주님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지만, 세상에서는 아무리 지혜자라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 특히 죽음을 앞둔 분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전달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전도서 2:2절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

1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2절은 그 ‘쾌락’를 ‘웃음’과 ‘희락(=쾌락)’으로 나눈 뒤, 전자는 ‘미친 것’으로 후자는 ‘아무 소용 없는 것”으로 규정합니다. ‘웃음’과 ‘희락(=쾌락)’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교차해 사용되나, ‘웃음’은 피상적인 기쁨을, ‘희락’은 좀 더 진지한 기쁨을 표시합니다. 이같은 뉘앙스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하나님을 떠난 쾌락이나 즐거움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취지를 말합니다. 잠언은 ‘웃음’과 ‘희락’의 추구가 종종 ‘슬픔’과 ‘근심’을 숨기기 위함임을 지적합니다(잠언14:13). 게임, 술, 마약, 도박에 빠져 사는 현실도피의 삶이죠! 따라서,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이 그 삶에 있는지 파악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전도자의 충고를 따르려면 웃음과 쾌락 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가장 좋은 예가, 직업을 갖고 우리 손으로 수고한 만큼 벌고 그 한도에서 살려는 태도입니다. 경건한 삶의 기초가 여기 있습니다. 경건한 삶에도 당연히 즐거움과 웃음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웃을 때가 있다’(3:4)고 선언합니다. 다만, 바보와 현자의 경우, 웃고 즐거워 하는 시기와 대상에서 차이가 납니다. 바보는 악을 행함으로(부정축채, 더러운 농담 등), 현자는 지혜(선행과 덕을 세움 등)를 행함으로 웃고 즐거워 합니다(잠10:23).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웃음과 쾌락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전도서2:3절(새번역)
“지혜를 갈망해 온 나는,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렇게 사는 것이 짧은 한평생을 가장 보람 있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자는 삶의 의미 혹은 유익의 원천으로써 쾌락(즐거움)을 구체적으로 탐구합니다. 시작은 가장 감각적인 것, 즉 술입니다. 전도자는 짧은 인생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는 것이지 방탕에 몰입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하고, 낙을 누려 보려고 마음먹은 적도 있다”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툼이 있으나, 술과 관련한 실험에서 전도자는 품위를 유지하였다는 해석이 옳습니다. 그래서, 루폴드는 “전도자는 술을 방탕한 자가 아니라 감정가로서 탐구했다”고 강조하는데, 근거는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개정개혁)라는 부분입니다.” 다만,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개정개역)라는 표현을 보아 전도자가 술중독은 아니지만, 술에 자신을 맡겨 본 경험은 가져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잠언은 ‘어리석음’을 지혜의 반대로, 전도서에서는 ‘악함’(7:25)의 동의어로 파악합니다. 따라서 전도자는 세상이 정의하는 쾌락을 탐구하고, 그것이 실제로 삶에 의미를 제공하는지 보려고 술잔의 바닥까지 비어 본 것입니다. 물론, 그 실험은 무의미로 귀결됩니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삶에 대한 세상의 답은 “자신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짜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즐거움의 상징인 ‘술’에 대한 탐익은 ‘절제’를 요구하시는 성령님의 뜻에 거역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 하고,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5:18,새번역).

사도행전13:1절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의 지도층은 출신과 지역이 서로 다른 5명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로스 출신 레위인이고, 시므온은 흑인인데, 그의 별명이 ‘니게르’(라틴어 ‘검다’)이기 때문입니다. 루기오는 북아프리카(현 리비아 지역) 출신의 로마인으로 보이고,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 분봉왕과 함께 자란 인물로 높은 지위의 귀족입니다. 사울은 튀르키에 남서쪽 다소라는 큰 도시 출신의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방 선교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였고 성령께서 이들 중 바나바와 사울을 택하여 사도로 소아시아 지역에 보내 본격적인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후 교회는 이 모델을 따라 준비된 일꾼들을 각 나라와 지역으로 파송하였고, 1800년이 지나자 조선에도 도착하였습니다. 조선으로 파송받은 선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겪었던 출신과 신분 사이의 갈등을 함께 겪었고, 이를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해결해 왔습니다. 제1차, 2차 대전을 겪고 비로소 깨달은 앙리 베르그송처럼, 지금 대한민국은 인간이 만든 법률 보다 상위의 가르침, 즉,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웃 사랑)을 배울 때입니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주님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만민을 포용하고 화목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종말론적 실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역사는 그런 갈등을 ‘그리스도의 법’을 통해 해결한 역사 그 자체이며, 그리스도의 법의 가장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연동교회의 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5:10)


갈라디아서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갖바치(가죽신 제조) 천민 고찬익(1857)은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중, 선교사 게일에게 전도 받고 회심하여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됩니다. 회심 일화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은 그날, 고씨는 꿈에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을 듣습니다. 두려움에 “고…고…고”라고만 대답하자, 다시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음성에, “내 이름은 고가이고, 싸움꾼, 술꾼에 망나니올시다. 뉘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울며 대답합니다. 그때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고씨의 몸을 치면서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말하고 사라집니다. 고씨는 꿈에서 깨어나 전도지를 또 읽고 게일을 찾아 갔고, 주님을 영접하여 새사람이 됩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씨에게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찬익 贊翼’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1896년 무어 선교사는 천민 거주지인 종로 5가 부근에서 연동교회를 창립하고 1900년 게일 선교사가 담임 목사를 맡습니다. 고찬익은 조사로서 갖바치, 백정 등에게 전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의회가 열렸습니다. 교인들은 양반이 아니라 천민 고찬익을 첫 장로로 선출하였습니다. 일부 양반들은 교회를 떠났지만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천 이백석 되는 예배당까지 신축하였습니다(1908). 세상을 떠났을 때(1908), “고찬익 장로는 한국에서 자신이 만난 가장 위대한 신앙인”(게일 선교사)으로 평할 정도로 그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