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2/16-20)


갈라디아서 6:9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야기는 선행이며,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그 선행을 재료 삼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십니다. 그레이실라 비치의 글입니다. “교직에 몸담은 첫해의 선생님은 젋고 열정적이었다. 제일 처음 부임한 학교는 쿠바 하바나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에 있었다. 선생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아이는 아홉 살 난 여자아이로 갈색머리에 표정으로 가득찬 눈을 가진 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단정했으나 신발은 매우 낡아 2학기 시작될 무렵에는 거의 넝마 조각 같았다. 선생님은 가죽으로 리본이 달린 새 신발을 한 켤레 사 주셨다. 너무 예뻤다. 학년 말 선생은 하바나 시의 다른 학교로 전근하셨고, 30년을 가르치신 후 은퇴하여 글을 쓰고 계셨다. 어느 날 선생님은  폐렴이 심하게 걸려 작은 개인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병원에 종사하는 분들의 탁월한 서비스에 놀랐다. 그래서, 다른 환자에게 자신의 감동을 이야기 하자, 그 환자도 동의하면서, “특히 부인께서 입원하신 후에는 더 친절해졌습니다.” 하였다. 결론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병원 원장이신 멘데스 박사님이 특별 돌봄을 지시하셨습니다.”고 하였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원장에게 가서 초면인데 이렇게 특별한 돌봄을 감사드린다고 하니, 멘데스 박사는 “지금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에요. 선생님께서 30여년 전에 새 신발을 받은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저예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소중한 그 가죽 신발 말이에요!” 주님은 보상받지 못한 선행은 오히려 복이 되어,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 14) 하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73-75쪽, 참조)

전도서1:17절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전도자는 이미 긍정적인 측면(13,16)에서 지혜를 살펴보았고 본절에서는 지혜와 정반대인 ‘어리석음’을 탐구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연구했음을 밝히지만, 둘 다 연구한 이유는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둘 중 하나에서 의미나 즐거움이 있는지 찾아본 뒤, 무엇이 참된 지혜인가를 명확히 하고자 어리석음까지도 연구하였다고 생각됩니다. 혹은,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전의 양면이므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해 양 측면을 모두 살펴보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전도자는 자신의 탐구가 실패하였음을 자인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고 하여도 잡지 못하듯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섭렵하였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음을 말합니다. 더 나쁜 것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지혜와 지식을 추구할수록 괴로움은 더욱 많아진다는 역설입니다(18).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잠1:8)를 전제로 하나, 본절의 지혜는 하나님이 고려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로 보건데 전도자는 믿음의 길에서 방황 한 뒤 얻은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 5개로 된 ‘리보스’의 2번 탄소에 ‘산소’가 있으면 RNA(리보스 핵산)을 구성하고, ‘산소’가 없으면 DNA(디옥시리보스 핵산)가 되어 전혀 다른 기능을 갖게 합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은총이나, 세상은 주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거부합니다. 결과는 삶의 무의미와 사망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전도서1:18절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본절은 지혜를 얻게 되면 근심 역시 수반된다는 점을 지적하여, 지혜도 허무하다고 밝힙니다. 이로써, 1-11절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삶이 무의미함을, 12-18절은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가치인 지혜와 그런 지혜의 추구조차 허무함을 선언하여, 해 아래 사는 인간의 모든 수고가 무의미함을 가르칩니다. 전도자의 선언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낸 것이지, 신자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전도자는 자신을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 밝히는데, 솔로몬은 성경의 전통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와 지식의 탐험 여정은 믿음 깊은 신자의 여정이므로, 성숙한 신자도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면 방황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 방황이 전도자와 같은 지적 방황이냐, 아니면 욥과 같은 고난의 방황인가의 차이 뿐입니다. 고난 중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의롭게 살아온 자신에 대해 변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이유를 알고 싶어 괴로워 합니다. 시인 아삽은 악인은 잘 살고 건강하나, 매일 고난을 당하는 자신을 보고 낙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서에서 보듯이 아무런 삶의 고난이 없고 풍족 하여도 방황할 수 있는데, 그것은 삶의 의미나, 자아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적 방황 때문입니다. 좋은 예가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 입니다. 전도자에 따르면, 이 철학적, 신학적 주제는 해 아래 인간에게는 지기 어려운 무거운 짐이라고 토로합니다(13).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3:13)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창세기 10:22절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이스라엘 족속은 아르박삿, 아람 족속은 아람의 후손으로 모두 셈의 자손입니다만, 고대에 두 민족은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지금 아사드 대통령이 물러난 시리아를 이스라엘은 맹폭하는데 시리아는 성경 시대의 아람 제국과 동일한 지역입니다. 갈등은 3천년이나 됐습니다. 전쟁은 아람 임금 하사엘 시대(BC842-796)에 심하였습니다. 주님은 북왕국을 징계하시려고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그 후 아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히는 장면들이 성경 곳곳에 등장합니다. 한편,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병거용 말의 눈가리개들 중에는 아람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하다드 신께서 우리 주 하사엘에게 하사하신” 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하사엘의 역사성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유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텔 단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이다. 여기에는 성경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는 역사적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다윗 집’이라는 유다 왕국의 호칭이 나온다’「아람 임금 하사엘,76쪽」. 주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종교적으로 타락하자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셨고, 하사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공격하고, 가드를 점령한 다음 예루살렘을 향하자(왕하12:17), 유다 왕(요아스)은 성전의 성물과 왕궁의 금을 모두 바쳐 공격을 면합니다. 하사엘이 쳐서 점령한 가드 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은 1996년 이후 현재까지 하사엘의 공격진영과 파괴된 여러 흔적들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며 유일하게 하나님의 시각에서 역사를 기록한 신앙 교훈의 보고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시편73:26절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예전에 본 드라마입니다. 매우 곤궁한 어느 가장이 정신 이상이 되어 방 한구석에서 종이에 백 만원, 천 만원 등의 숫자를 쓰고 돈이라고 하다가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치료를 받는 중 의사가 정신을 차려 현실을 직시하라고 일침을 놓자 그는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퇴원하였으나 어려운 경제 현실에 직면하자 마음은 다시 무너졌고 이전과 같이 종이 돈을 만들어 공중에 뿌리는 장면과 함께 드라마는 끝납니다. 무너진 마음을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본 시편의 저자는 아삽(다윗의 성가대장)으로, 자신은 경건하나 매일 고통 중에 살고 있는데, 악인들의 형통과 교만을 보자 고민에 빠집니다.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고, 아삽은 늘 교훈하사 지혜롭고 바른 삶을 살게 하시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하실 계획이셨던 것이죠! 아삽은 하나님이 ‘마음의 반석’이요, ‘삶의 힘’이 되심을 깨닫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의 몫은 재산, 명예, 권력 등이지만, 아삽은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임을 깨닫습니다. 실로 그분의 인자(신실한 사랑)는 생명 보다 낫습니다!(시편63:3). 믿음 생활은 즐겁게 주님의 뜻을 행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드린 기도가 응답받는 삶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그때 주님 자신이 우리의 몫(재산, 유산)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은 단순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가 결합되어 선을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이야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편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