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2/9 – 13)


「참 기특한 실수」
누가복음 2: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켄디 챈드의 성탄절이야기입니다. “그 해 아들 니콜라스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고 성탄절 학예발표회 최종 연습을 구경하러 갔다. 이윽고 담임 선생님들의 인솔에 따라 들어온 학생들은 모두 식당 바닥에 앉아 청중이 되었다가, 발표 순서가 되면 무대에 올라갔다. 예상 대로 아기 예수, 구유, 그리스도의 귀중한 생명의 선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콜라스 반은 ‘크리스마스의 사랑, Christmas Love’이란 노래를 불렀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아이들은 각각 큰 글자를 갖고 있었고, 하나씩 들어서 노래 제목을 만들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C는 크리스마스의 C”라고 노래하면 한 아이가 글자 C를 들었고, 또 “H는 해피의 H”라고 노래하면 다른 아이가 글자 H를 들었다. 이렇게 계속하면 마지막에는 노래 제목인 “Christmas Love”라는 메시지가 연출되는 것이었다. 발표는 매끄럽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한 여학생이 글자 M을 거꾸로 들어 ‘W’자가 되었다. 실수였다. 게다가 그 학생은 조금씩 움직여 원래의 자리에서 약간 옆으로 서는 통에 글자 간격이 이상하게 벌어졌다. 청중석의 아이들은 그 실수에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지만, 순진한 아이는 당당하게 ‘W’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글자가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다함께 보았고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전체 글자와 메시지는 “Christ was Love”(그리스도는 사랑이셨습니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270-73쪽, 참조)

전도서 1:15절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본절은 속담체로, 인간의 무능력을 간명하고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구부러진 것’이란 인간의 입장에서 고쳐지기 바라는 모든 잘못된 상태이나, 문맥상 도덕적인 의미는 없습니다. 특히, 유사한 구절인 7:13절(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과 비교할 때 자명합니다. ‘구부러진 것’의 예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요9:1)으로, 그는 눈동자가 없어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고칠 수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합니다. 인간은 마음대로 세상을 다룰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해야 합니다. 또 ‘모자란 것’이란, ‘필요하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단은 ‘인간이 원하고 필요하지만 없는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라고 해석됩니다. 예로서, 모든 병을 치료하고, 죽지 않게 하는 ‘생명나무 열매’ 혹은 ‘생명의 떡’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본절에서 전도자는 이런 인간의 무능력을 깨닫고 절망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복음의 전제입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셨고, 이제 만유를 회복하사, 사망을 철폐하실 것입니다(롬8:17-25). 그러므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즉 맹인, 귀먹은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절름발이, 중풍병자, 문둥병자 등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신 것은 새 창조의 예표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생명나무’(요일5:13)와 ‘생명의 떡’(요6:35)이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전도서 1:16절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2-15절은 세상 모든 일의 허무함을 밝히나, 16,17절은 그런 지혜 추구 과정 자체도 허무하고 무의미함을 기술합니다. 본절은 두 번째 성찰의 문구로서, 전도자는 자신의 신임장을 제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을 ‘전대미문의 탁월한 지혜자’로 자칭하는 것 같아 다소 주제넘게 들리지만, 그것이 본절의 초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런 지혜를 갖고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와 역대서를 보면, 솔로몬은 어린 나이에 왕 위에 등극하자 정적- 아도니야, 요압, 시므이-을 지혜롭고 과감하게 처단합니다. 나라가 자신의 손에 굳게 세워지자, 비로소 기브온에 갔고, 직접 일천번제를 드려 주님을 감동시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받기 전에도 매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감동하신 주님이 원하는 것을 묻자, 그는 맡은 왕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재판의 지혜(‘듣는 마음’)를 구합니다. 주님은 기뻐하사, 판결의 지혜는 물론, 지식과 재물까지 주십니다. 솔로몬은 정말 현명한 왕이 되었고, 그 지혜로 부국강병을 이룩하였으나,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우상숭배로 전락하였고, 이스라엘 왕국 분열의 모든 씨앗을 뿌립니다. 그는 단명은 아니지만 장수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지혜가 바로 세상 지혜입니다. 솔로몬 같이, 사람은 주님에 대한 순종을 떠나면 행복도 또한 떠나버립니다. 행복은 주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자만이 가지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시편84:12,새번역)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아람 사람들”
사도행전 17: 26절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온 인류의 조상은 노아이며, 노아의 아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고, 그중 한 명이 ‘아람(=고지대)’으로, 적어도 BC1200년경부터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경계에서 시작하여 동쪽 유프라테스 강까지 펼쳐 살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셈의 아들 아르박삿의 후손이나, 신명기는 야곱을 ‘방랑하는 아람 사람’(신26:5)이라 하였는데, 리브가나 레아와 라헬이 아람 사람이고, 야곱 역시 20년을 아람에서 지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아람 왕국은 다윗 시대 이후 적대적이 되었고, 특히 벤하닷과 하사엘 왕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왕상20:26;왕하6:24). 그러나 두 나라는 필요에 따라 무역을 하거나 왕래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말을 이집트에서 사서 아람 임금들에게 되팔았고(왕상10:29), 아람의 나아만 장군은 나병 치료를 위해 이스라엘을 직접 방문한 것이 그 예입니다(왕하5장). 아람이 고대 문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앗수르 왕 디슬랏 빌레셀1세(BC1114)의 연대기이며, 그는 아람 사람들을 정복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아람은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 당합니다(BC720). 또한, 1966년 텔 단에서 출토된 석비는 다윗 가문과 하사엘 아람 왕에 관해 기록하여 성경을 뒷받침합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특히 유다 왕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이들은 강대국의 침략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그분의 도움으로 살아간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지금 비상계엄사태로 어지럽습니다. 적법절차를 따라 조속한 정국 안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국가나 개인이나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잠언3:5절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새번역)

즐겁게, 그리고 고된 노동 후에는 그 결과는 하나님 손에 맡겨야 안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맡겨주신 일을 열심히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수고는 여기까지이며, 나머지는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후, 잠을 자야 합니다. 온갖 감정이 요동칠 수 있으나, 주님이 맡으셨음을 생각하고 근심을 몰아내는 연습은 경건의 훈련 중 하나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7)고 명령합니다. 모순어법 같지만, 온갖 염려·불안으로 마음은 무거우나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근거로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정직하게 살고 염려되는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면 이렇게 해결되는구나!”는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 믿음의 담대함을 줍니다. 하나님은 “당신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롬8:32)이니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따라서, 신자는 주님을 본받아 안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폭풍으로 배에 물이 가득하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찼으나, 주님은 고물에서 깊히 주무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치신 날 저녁이라 피곤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제 아버지께 맡깁니다” 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께 죽음 이후의 일을 맡기신 후 운명하셨습니다(눅23:46). 그 결과는 부활이었고, 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