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6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본문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사건의 배경으로, 주님은 2틀을 지체하심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만드셨습니다. 낸시에게는 다운증후군을 가진 5살 딸 사라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7월의 아침, 부러진 선풍기의 날개 소리에 잠을 깨자, 자신의 삶 중 부러진 것들이 떠올랐습니다. 사라의 심장 수술 등으로, 엄청난 병원 빚과 함께, 얼마 후면 남펀의 일자리도, 집도 없어질 것입니다. 성경학교에 갈 시간이 이르자 사라는 필요 없는 물건으로 채워진 가방을 메고 “짜잔”하면서 나타났습니다. 사라를 성경 학교에 데려다 주고 여러 가지 용무를 보았습니다. 낸시는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 세 아이를 어떻게 양육하지?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실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자 생각이 멈췄습니다. 이윽고 낸시는 교회에 다시 도착하였고, 사라가 있는 예배당으로 갔습니다. 사라는 배낭을 메고 모자도 반바지도 윗도리도 모두 거꾸로 입고 있었습니다. “사라를 정말 사랑한다”는 마음이 스쳐 지나간 바로 그때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자신도 마치 사라의 거꾸로 입은 옷처럼 부조화에 엉망일 것입니다. ‘왜 너는 걱정과 의심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쓸모없는 배낭을 메고 있니? 내가 그 배낭을 대신 메 주마”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넉넉히 공급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낸시는 그날 밤 사라를 양육하는 특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111-14쪽, 참조)
전도서1:13절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3-15절까지는 전도자 자신의 지혜 추구의 결과의 허무를 선언힙니다. ‘지혜를 써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는 고백은 솔로몬의 최고의 지혜가 결집된 책이 전도서로서(참조 왕하4:29-34), 그가 살핀 인생은 한 마디로 “괴롭다”로 정의되는데, 고통을 수반하지만 아무런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고통스러운 노역”이라 직역됩니다. 불교에 “인생은 고해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나, 전도서는 인간의 모든 일이 무의미를 넘어 고통스럽기까지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였기 때문임을 밝혔다는 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철학자들은 지혜 탐구의 삶의 고귀성을 주장하나, 본절은 오히려 ‘괴로운 일’(혹은 ‘지저분한 일’)로 묘사합니다. 인간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주사 수고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창3:17-19). 마치 하데스에게 벌 받아 영원히 돌을 굴려올리는 시지푸스와 같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본절은 이런 ‘괴로운 일들’이 왜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할까요? 지식과 지혜를 포함한 모든 삶이 주권자인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타락한 인간은 이를 무시하고 지혜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자들의 작업을 어리석게 하십니다. 대표자가 니이체입니다. 그는 평생 가족을 의심하며 초인을 부르짖고 혼자 살려고 하였지만, 정신병에 걸린 말년의 10년은 어머니와 누이의 도움으로 살았습니다. 절대 강자가 정한 구조를 인간은 넘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가 지혜자입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3:20).
전도서 1:14절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자는 모든 일이 시간과 죽음 앞에서 사라질 운명이라, ‘지적 노동’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지적합니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란 “절대 잡을 수 없고, 설령 잡는다 해도 아무것도 없다”는 함의가 있습니다. ‘하늘 아래’(13)를 ‘해 아래’로 바꾸었지만, 둘 다 인간 세상을 의미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겪은 다양한 사건과 삶을 성찰하면서 얻은 깊은 지혜를 주려 합니다. 먼저, 13절은 세상사를 ‘괴로운 것’이라 결론 짓고, 14절은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임을 토로하여 괴로움을 강조합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선풍기 앞에서 바람을 쐬다가 바람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잡지 못한 것에 비유됩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는 시도하다 안 되면 화를 내고 결국 절망하여 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삶의 의미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또한, 바람은 표식이나 경고없이 진로를 변경하고, 이리저리 불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현상이,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과 매우 흡사합니다. 1920년에 발병한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 그 후 100년이 지난 2020년의 코로나 19로 7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돌연 사망이 닥치매 악인· 의인· 지혜자· 우매자 모두 동일하게 죽어 자취가 남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헛될 뿐입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돌보시며 만민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편37:24,새번역)
「라기스」
역대하 32:19절
“그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비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사람의 신들을 비방하듯 하였더라”
본절은 앗수르 왕 산헤립(BC705-681)이 라기스를 공격하는 중 신하들을 예루살렘에 보내 수행한 심리전을 묘사합니다. 산헤립의 일대기는 그가 46개의 도시를 치고 예루살렘을 향했으며 히스기야로부터 상당한 조공을 얻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왕기하 18:14-17과 역대기하 32:9 의 히스기야의 조공 기록과 부합합니다. 라기스 전쟁은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 벽 부조에도 새겨졌습니다. 라기스 주변은 대추야자나무와 포도나무로 둘러싸였고, 이중 성벽이며, 성문의 탑과 성문으로 향하는 경사진 비탈길도 보입니다. 또한, 그 당시 남왕국 유다의 의복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앗수르 군사들과 다른 헬멧과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또한, 라기스 성벽을 향한 공성퇴를 매단 병거가 보여, 언덕을 쌓아 공성퇴를 사용하였는 산헤립의 일대기 내용과 일치합니다. 전쟁의 극심함은 주변에서 발견되는 화재의 흔적과 함께 수백 개의 무기들, 즉 물맷돌, 화살촉, 창끝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으며, 벽 부조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너진 라기스는 80년 뒤 재건돼 요새로 쓰이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됩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믿고 앗수르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앗수르 제국과 유다의 충돌은 필연이었습니다(왕하18: 7,8). 전쟁을 대비한 히스기야 같이 주님을 신뢰하면서도 뱀 같은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히스기야 왕조차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교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늘 겸손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어떤 이는 전차를 자랑하고, 어떤 이는 기마를 자랑하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만을 자랑합니다.”(시편20:7)
시편128: 2절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경건한 삶의 두 번째는 ‘고된 노동’입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 후 인류에게 선고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관리하면서 즐겁게 노동을 하던 아담이 범죄하자 쫓아내시면서 고된 노동을 명령하셨는데, 여섯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① 징계의 의미 : 땅은 저주를 받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냄으로, 생존과 가족 부양을 위해 남자는 고된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창3:17-19). ② 지혜의 수단: 일을 통해 하나님이 숨겨둔 지혜를 체득하며, 고된 수고를 통해 그 열매의 가치를 깨닫게 하십니다.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 수고를 통해 양식과 재물을 얻지만,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열매를 맺습니다. 농부는 자신의 노력만으로 곡식이 영글지 못함을, 상인 역시 노력만 한다고 재물을 얻지 못하고 때와 기회가 와야 함을 깨닫는 것처럼, 일에 착수하여 성과를 얻기까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여러 변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교만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④ 성례전적 시각: 그리스도인은 일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에, 고된 노동 가운데 즐거움을 찾습니다. ⑤ 왕 같은 제사장: 신자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수고를 해야 사람들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습니다. ⑥주님의 심판 : 최후의 심판 시 주님은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 있지 않는 열매들은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불의와 탐욕을 버리고 주님만 의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계획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16:1).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