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1:9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5-8절에서, 전도자는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자연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허무성을 지적합니다. 특히 8절은 기계적 순환을 거듭하는 해 아래에서 만족을 모르는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고통과 무의미를 탄식하나, 9-11절은 새로운 것이 없는 무의미한 세상에, 인간은 왔다가는 사라져 기억조차 없는 허무한 존재임을 밝힙니다. 전단을 직역하면, “과거에 있었던 바로 그것이 (장래에) 있을 그것이다”, 중단은, “그리고 (과거에) 행해진 바로 그것이 (장래에) 행해질 바로 그것이다”로 직역됩니다. 미래는 과거의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후단은, “그러므로 해 아래에서는 새로운 그 어떤 것도 없다”라고 직역됩니다. ‘새 것’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욕망은 삶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왔습니다. 자동차, 컴퓨터, 비행기, 냉장고, 에어콘 등이 그 좋은 예로 인간의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하는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탄생, 결혼, 직업, 사망 등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기본구조는 물론, 명예, 권력, 돈,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역시 변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새 것’은 없습니다. 고대 아카디아인도 “과거의 삶은 곧 모든 날들의 삶과 같다”는 격언을 남긴 바 있지만, 전도서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긍정적 명제로 나아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무의미성’을 직시케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음을 복음은 선포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전도서1:10절
“”보라, 이것은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새번역)
9-11절은 “해 아래 인간의 삶의 무의미’가 주제입니다. 9절은 “해 아래에 새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10절은 역사가의 입장에서 이를 뒷받침합니다. 먼저, 자연계에는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계속 떴다 지고, 강물은 계속 흘러 왔고, 바람도 쉬지 않고 이리 불고 저리 불지만 그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모든 인간은, 탄생하고, 성장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늙은 뒤 죽는 반복의 역사입니다. 아무도 왜 태어나서, 왜 살고, 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우리가 던지는 이 질문은, 이전의 세대도 가졌고, 장래 세대도 같은 질문을 가질 것이나 아무도 해답을 갖지 못했고 못할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은 새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요?” 한편, 자연 현상의 반복과 인간 역사의 반복은 차이가 있습니다.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다”고 믿지만, “내가 내일 살아서 그것을 볼 것이다”고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도, 우연히 내던져진 자신의 삶 또한 무의미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더 고민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예수의 복음은 이 양자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합니다. 삶에는 의미를 부여하고(영생), 죽음과 심판과 관해서는 죄사함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새 것에 대한 좋은 소식’입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
「버려진 포도밭」
이사야5:3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엘라 골짜기에서 버스로 약 20분 거리에 라기스 골짜기가 있으며, 그 사이에는 평지의 나지막한 산들과 들녘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상목 작가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포도밭’을 찾곤 합니다: “그 포도밭은 울타리가 무너지고 잡초가 무성하며 가지가 부러지고 헝클어진 머리 같아 보기에도 흉측하다.” 김작가의 경험담입니다. 작가가 오래 전 이스라엘에 유학할 당시 이 지역을 답사하던 교수는 갑자기 멈추어 서서, 이사야서 5장을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이윽고 교수는 ‘버려진 포도밭’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으로 보고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라 말하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버려진 포도밭’은 두려움이고 무서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서 이스라엘 평지를 걸어 다닐 수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드렸고, 이 후 그 현장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인, 도덕법을 빌트인시키셨습니다(마5:17,18). 동물 중 오직 인간만이 만물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예입니다. “물은 만물에 이로움을 주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와 가깝다”며 물을 도(道)에 비유하였지만, 이 도를 성취하신 분은 도성인신하여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걱정은 주님께 맡기시고, 들포도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를 맺도록 기도하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잠언12:15절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행위가 옳은 줄로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충고를 듣는다”(현대인의성경)
스티브는 정기검진을 받은 지 며칠 후 전화가 옵니다. “오늘 오후에 병원에 오셔야 하겠습니다.” 스티브는 다소 당황해서 의사에게 갑니다. “앉아주세요, 스티브.”라고 말한 뒤, 의사는 말합니다: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는데요, 췌장암 초기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혈압도 낮고 콜레스테롤도 낮은 데요!” 놀란 스티브의 말에, 의사는 대답합니다. “아직 초기이지만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합시다.” 스티브는 의사의 진단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철학으로 암치료를 거부하면 안 됩니다. 찰스 다윈(1809-1882)이 “생물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다”는 내용의 「종의 기원」을 냈고, 불가지론과 믿음 사이를 고민하다 말년에 성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립니다. 진화론은 그것이 전제하는 태양, 공간. 시간의 존재를 설명 못하며, 과학임을 자인한다면 종교는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위 무신론자들과 진화론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자 다윈은 성경의 충고를 듣고, 하나님을 굳게 붙잡았어야 합니다. 유전학을 모르는 다윈의 진화론은 형체의 비교를 통한 추측에 근거하여 이론을 전개하였고, 진화 방향의 예측이나, 검증 방법도 없어 진화 철학에 가깝습니다. 다만, 자연선택, 생명나무의 개념을 남겨 유전학을 근거한 후세의 신다윈주의자들의 출현에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반면, 성경은 발생한 사실에 관한 증언이 기록된 문서들의 집합으로 그 역사적 신빙성과 영감을 담은 가르침은 유일무이합니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