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1/11-15)


에스더6:1절
“그 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왕궁 바깥뜰에 이른 때, 왕은 모르드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메리와 남편 로렌은 둘째 아들 마이클을 낳은 뒤(1991년) 정기 검진에서 아기의 머리가 문제되어 엑스레이를 찍었으나 정상이었습니다. 한 달 후 메리는 두 아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서 평소와는 다르게 뒤쪽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그때 한 낯선 남자가 자신을 뚫어지라고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예배 후 그 남자는 와서 마이클의 머리를 부드럽게 만지면서 “제가 보기에 아드님은 선천성 골유합증인 것 같습니다. 두개골이 너무 일찍 붙어 버리는 증세이니 즉시 소아 신경 전문의를 찾아가 보세요.” “어떻게 아세요?” “저는 오하이오에서 방문차 들른 소아 신경 외과 전문의입니다. 부인의 아들은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메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주치의를 통해 덴버 시의 전문의를 소개받았으나, 빠른 시일 내 진료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병원에 전화를 하자 접수원은 방금 예약을 취소한 분이 있어 그 시간이 비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덴버 시의 그 전문의는 같은 진단을 내리고 “아이의 두개골이 이미 닫혀 뇌가 더 이상 자랄 공간이 없습니다. 수술해야만 합니다. 다행히 아기가 어려 수술하면 충분히 성공할 가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제때 아이를 데려오셨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두개골을 벌려 뇌가 자랄 공간을 마련하는 8시간의 대수술 후 마이클은 정상으로 자랐습니다. 이 사건 이후 메리는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전3:11a)

전도서1:7절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도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며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 다시 바다로 흐른다.”(현대인의성경)

갈릴리 호수(해저 200미터)로부터 남쪽 사해(해저400미터)로 흘러내리는 강은 요단으로, 그 강물은 급하게 흐르나 사해의 수위를 결코 높이지 못합니다. 뜨거운 햇빛 때문입니다. 이 같이 끊임없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키나 아무런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마지막 예는 강물입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를 향해 쉴 새 없이 흘러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강물의 노력은 무의미합니다. 물론, 과학적 견지에서는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는 중에 많은 유익을 인간과 생물 그리고 식물에게 주지만, 전도자는 바다를 채우려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의 겉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무의미를 논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강물의 흐름처럼, 인간이 목표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음박질 하여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만족이나 삶의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 물은 강으로 되돌아가”란 번역은 다툼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속적으로 흐르나 효과 없이 바다로 계속 들어간다는 의미(개정개역) 임을, 다른 하나는 물이 다시 한 번 흐르기 위해 강의 발원지로 계속 되돌아가는 의미(새번역)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도 무방한 것은, 강물의 계속 혹은 반복된 흐름은 인간의 헛된 노력을, ‘채워지지 않는 바다’란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란 다가올 세상을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롬2:6)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2:7).

전도서1:8절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자는 6-7절에서, 해, 바람, 강물의 비유를 들어 해 아래 허탄한 인생의 모습을 표현하였으나, 본절은 만물로 확장합니다. 먼저, 3절을 문법에 따라 다시 번역하면, “모든 일이 피곤하다. ①사람이 그것들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으며, ②눈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며, ③귀는 듣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가 됩니다. 솔로몬은 자연계를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움직이며, 다만 괴롭고 피곤할 뿐이라는 명제를 먼저 선언한 뒤, 강조를 위해 3개의 부정문이 뒤따릅니다: 첫째, ‘말로 다 말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로 모든 만물을 꿰뚫는 이론은 수립 불가능합니다. 수 많은 논쟁, 이론이 명멸하니 이 또한 헛되고 피곤합니다. 둘째, 눈은 많은 것을 보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느끼지 않고, 셋째, 귀는 끊임없이 들을 수 있지만 들을 것은 더 많습니다. 이를 통해 솔로몬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삶 자체가 해, 강물, 바람의 움직임 같이 무의미하고 피곤함을 재차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고 만물을 보면, 피곤함이 아니라 경이와 소망이 차오릅니다. 하나님은 언어 없이도 당신의 영광과 뜻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데(시편19:1), 그리스도 안에서 그것을 깨닫는 자의 마음은 평안과 쉼을 얻습니다(마11:28). 어거스틴의 고백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고백록).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시편23:1,2, 새번역).

「엘라골짜기」
사무엘상17:1절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군대를 모으고 싸우고자 하여 유다에 속한 소고에 모여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에 진 치매”

본문의 지리적 배경은 엘라 골짜기입니다. 엘라 골짜기는 블레셋 평야에서 이스라엘 산지로 올라가는 세 번째 통로이며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통과하여 산 능선 길을 따라 해발 700-1,000m 산악지역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베들레헴에 도착하며, 북으로 예루살렘, 남으로 헤브론을 공략할 수 있기에,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것입니다. 한편, 골리앗의 고향 ‘가드’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 산악지역을 향해 걸어가면 우편에 우뚝 솟은 텔(언덕 요새)이 ‘아세가’이며 이스라엘의 1차 방어성입니다. 이어 엘라 골짜기는 양쪽에 서 있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폭으로 좁아지고, 산지를 향해  3km를 들어가면 이스라엘 2차 방어성 ‘소고’가 있습니다. 계속 올라가면 골짜기는 마치 입을 벌리듯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이 평지의 우편 산기슭에 ‘아둘람’(삼상22:1), 그 위로 ‘그일라’(삼상23:1)가 있습니다. 다윗은 승리의 함성이 가시기도 전에 도망자가 되어 블레셋 성 ‘가드’로 피신하였지만,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척 하여 탈출한 뒤, 아둘람 굴에 600명과 함께 은거하는 중에도,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나 배신을 알고 떠납니다. 이 같이 엘라 골짜기는 명암이 교차했던 다윗의 일생의 예고편입니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통일이라는 대업을 성취합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나가시는 것과 같습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

시편127:2절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와 신뢰하는 자의 삶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본절이 노래하는 ‘쉼’입니다. 전자는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도 마음이 불안하여 안절부절하지 못하지만, 후자는 똑같이 고된 일과를 마치고 가정에 돌아가나 주님 안에서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신자 역시 똑같은 걱정, 근심 그리고 일의 결과에 대한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손에 그 모두를 맡기고(벧전5:7),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신자가 서 있는 믿음의 토대는 확고합니다: “내가 경영하고 노력하지만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시편37:3-6). 의사가 병을 치료하는 것은 수술하고 약을 발라 싸맬 뿐이나, 그것을 낫게 하시는 분은 주님인 것과 같습니다. 신자는 가정, 삶, 하루의 일과, 사물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해리 블레마이어의 “성례전적 시각”의 취지입니다. 삶을 성례전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감사와 함께 도착되어진 것에 만족합니다(히13:5). 왜냐하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은 똑같지만 시각이 달라지니 삶은 풍요로워지고 마음은 쉼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멍에를 지고 그분을 배우니,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