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0/28-11/1)

특별한 식탁보
룻기2: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1948년 10월 초 젊은 목사 부부가 오래된 교회에 부임하여 건물을 보수하던 중 성탄절 이틀 앞두고 몰아친 폭풍우로 교회 강대상 바로 뒤의 벽에 큰 구멍이 났습니다. 낙심하였으나 그날 오후 중고등부의 자선 경매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아름다운 낡은 식탁보(4.5m)를 발견하고, 구입하여 그 구멍을 가렸습니다. 성탄절 전날은 눈보라가 몰아쳤습니다. 교회 문을 잠그고 나오던 목사님은 근처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한 중년 부인을 보고 교회에 들어와 추위를 피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최소한 30분은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개 숙여 기도한 부인은 벽에 걸린 식탁보를 보았고, 달려 나와 “제 거예요. 제 만찬용 식탁보가 틀림없어요!” 외치고는 한쪽 구석에 수놓아진 자신의 이름을 보여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부인은 유모 면접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그녀와 남편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살았는데, 2차대전 중 부인만 살아남고 남편은 나찌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부인은 식탁보를 교회에 놓아두고 떠났습니다. 그날 저녁 성탄 이브 예배 중 그 식탁보는 더없이 아름다웠습니다. 예배 후 한 노신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그 식탁보를 황홀한 듯 바라본 뒤, ”참 이상한 일이에요. 오래 전 제 아내와 저는 똑 같은 식탁보를 갖고 있었어요…비엔나에 살 때였는데”라는 순간 목사님은 그날 오후 교회에 들렀던 부인에 대해 애기 하였고, 두 분은 그렇게 다시 재회하였습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아름다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 출처: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17-20쪽)

전도서1:3절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2절은 해 아래 안생이 피할 수 없는 절대 허무를 선언하고, 3절부터 11절까지는 인생의 다양한 상황에 비추어도 절대 허무임을 확증합니다. 3절은 노동과 허무를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면, 무의미와 고통 속에서 살다가 덧없이 죽는 것이 인간 실존의 비극입니다. 이때, ‘해 아래에서’란 표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상은 다양한 사고방식이 존재합니다. 태양이 무엇인가? 신자들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하나임을 주장하지만, 불신자들은 태양의 존재를 우연으로 보고 인생에 대해 불가지론을 주장하거나, 어리석게도 태양을 신으로 경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양에 대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감사하며 수고하고, 불신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전혀 없으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심은 놀라운 은혜입니다(눅6:36). 한편, 모든 사람은 수고한 어떤 것도 갖고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해 아래’로 표현된 이 세상에서, 열심히 땀흘리고 살아간들, 자신이 먹고 마시며 일하는 즐거움을 빼면 실제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허무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이므로(전12:14), 속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악한 친구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히므로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고전15:33,34).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 시 수고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25:25)

전도서1:4절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3절에서는 수사의문문을 사용하여 ‘해 아래’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노동과 허무를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짧은 인생에 주목하고 대구법을 포함 3중으로 허무를 강조합니다. (1) ‘한 세대’에 해당하는 ‘또르’는 ‘선회하다, 돌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이며, 한 사람이 태어나서 생존해 있는 기간과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지칭합니다. 끊임 없이 흐르는 유구한 세월에 비한다면 한 개인의 일생은 극히 짧습니다. 마치 찰나에 불과한데, 그 짧은 시간 속에 인간이 업적을 쌓고자 발버둥을 쳐도 무슨 의미를 남기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그야말로 허무한 존재입니다. (2) 또한, ‘가고’와 ‘오되’의 히브리어는 모두 분사형으로 ‘끊임 없이 가고 오는 현상이 계속됨”을 표현합니다. 전도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는 오는 일’이 계속되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더욱 허무하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3) 후단은 짧은 인생에 비해 “영원하다”라고 생각될 정도의 긴 세월을 존속하는 땅을 등장시켜, 인생 무상을 강조합니다(반의 대구법). 물론 전도자나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창조된 이후 수십 억년을 존속하였고 앞으로도 오래 존속하겠지만 영원하지는 않으며, 시편기자도 그 점을 지적하여 노래합니다(시편102:26). 영원하신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현재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벧후3:10이하). 당연히 경건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날을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편90:10)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열왕기상22:39절
“아합의 남은 행적….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베니게(푀니키아) 사람들은 이집트나 인근 지역의 예술을 발전시켰는데, 근엄하게 앉아 있는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날개를 활짝 펴고 날렵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바꾼 것은 그 예입니다. 이들은 석수와 목수를 솔로몬 성전에 보내어 언약궤를 지키려고 날개를 활짝 편 그룹(천사)을 조각하였고, 이와 비슷하게, 그룹 이외에도 지성소와 외실의 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진 “종려나무와 활짝 핀 꽃모양”은 베니게의 상아 조각에서 흔히 보이는 이집트의 로투스 꽃 형상이나 종려와 꽃의 복합적인 모습으로 추측됩니다. 또한, 사마리아 궁전 발굴에서, 그룹, 종려, 활짝 핀 꽃 형상의 모습을 한 상아 조각 500여개를 얻었고, 베니게의 영향을 보게 됩니다. 오므리 왕은 아들 아합을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시켜 베니게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습니다. 따라서, 오므리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고(BC870년경) 이곳에 거대한 궁전을 지을 때 두로와 시돈은 목수와 석수들을 보냈으리라 판단됩니다. 특히 1910년 경 발굴된 ‘아합 왕의 상아궁’은 이들에 의해 주도 되었을 것입니다(임미영, 59쪽). 성도들이 세상과 교류하고, 발달된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나, 편리함과 화려함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상아궁’을 건축하고 이름을 남긴 아합 왕은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 보다 주님 보시기에 악하였습니다”(열상16:30). 이는 바알숭배 등의 죄 때문으로, 실로 헛된 명성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하나님 없는 인간- 니이체
전도서6:10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니이체(1844-1900)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만의 삶을 주장합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투라는 산을 내려오다 한 노인을 만나 후 ‘탄식합니다 :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구나?” 그리고 니이체는 ‘초인사상’을 전개합니다: “만약 신이 죽었다면, 끊임없이 반복하여 발생되는 수 많은 인간의 문제들, 즉, 고통, 죽음, 쾌락, 사랑, 허무함 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은 길은 하나다. 선악의 기준을 만들어 내던 신의 개념을 집어 던지고, 자유로워져라! 너 자신의 힘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할 ‘힘’을 추구하고, 초인(자신만이 가치척도, 자신에게 책임과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되라! 이것이 인간의 길이다.” “네가 네 자신의 주인이 되어, 네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라.” 니이체는 자아성찰의 무거운 짐을 지는 낙타의 기질, 새 가치를 위하여 권리를 쟁취하려는 사자의 정신, 어린아이처럼 삶을 놀이로 만들고 자신만의 세계를 되찾는 창조성을 요청합니다. 그러나니이체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치자, 마부에게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안고 울다가 그 자리에서 미칩니다. 이것이 유명한 이태리 ‘토리노의 말’이며, 10년 뒤 정신병원에서 사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니이체에게 인생은 너무 무거웠고 마음의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릅니다. 자신들이 죄와 연약함에 싸여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죄, 사망, 세상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니이체와 달리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