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0/21-25)

하나님의 유모(humour)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배란이 끊어진 90세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웃었고 모두 웃었습니다. ‘이삭’의 뜻은 ‘웃음’으로. 하나님의 유모 중 하나입니다. 이를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은 든든하게 되고, 삶은 사랑으로 훈훈합니다. 로빈은 오랜 암 투병 끝에 소천하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까 암 진단을 받으셨을 때 언니는 아기를 낳았고, 오빠는 갓 결혼한 터라 어머니의 간호는 막내딸(27)인 자신의 몫이 되었으나, 부담 아닌 명예였습니다. “이제 난 어쩌면 좋아요, 주님?” 교회 의자에 앉아 속으로 물었습니다. 늘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이 끝나고 혼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한 청년이 들어와 주위를 둘러 보더니 로빈 옆에 앉아 “늦어서 미안합니다”한 뒤 말 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몇 사람의 추모사가 끝나자 그가 로빈에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메리를 마가렛이라고 그러죠?” 알고 보니, 로빈의 어머니 장례식장을 자신의 이모(메리) 장례식장으로 오인한 것입니다. 로빈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장례식이 마치자, ‘릭’이라고 소개한 그 청년은 이제 이모 장례식에는 참석치 못하니 커피 한잔 하자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두 사람의 첫만남으로 1년 후 로빈과 릭은 결혼하였습니다. 모친을 돌본 로빈이 외롭게 혼자 남겨진 바로 그때 주님은 릭이란 배우자를 보내셨습니다. 두란노, 「사랑하는 가족에게 읽어 주고 싶은 이야기」.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다”(마25:36, 사역)

전도서1: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오늘부터 전도서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으로 알려졌는데, ‘잠언’이나 ‘아가서’와는 달리 솔로몬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란 문구와 1장과 2장의 내용을 검토하면, 분명히 솔로몬 왕이 맞습니다. ‘전도자’란 히브리어 ‘코헬레트’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스승’ or ‘리더’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풀어 쓰면, ‘스승-왕’ 정도의 어감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많은 염세주의적인 글을 남겼습니다. 주전14세기 바벨론 작품인 「염세주의자의 대화」가 그 예로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자살이라 적혀 있을 정도입니다. 전도서 역시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적시하지만, 기쁨과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의 가능성도 담겨 있기 때문에 세속적 염세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따라서, 전도서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주장의 결과에 직면하라고 도전하는 복음주의 소책자이면서, 삶의 ‘허무’, 악의 존재, 인생의 ‘수수께끼’와 같은 우리의 현실을 담아 내어, 피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지하게 삶을 대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도전하는 일면을 갖고 있습니다. J.S 라이트의 전도서 요약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미지의 것들에 대한 열쇠를 갖고 계시지만, 그것을 당신에게 주시지는 않을 것이다. 열쇠가 당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하나님이 그 문들을 열어 주시도록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할 말은 다 하였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전12:13,14, 새번역)

전도서1:2절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절대 허무와 신자의 본분’이란 본서의 주제를 ‘봉투구조’ (inclusion)라는 문학적 장치에 담습니다. 즉, 서론부(1:1-11)의 1:2절과 결론부(12:8-14)를 이끄는 12:8절에 ‘절대 허무’라는 유사한 내용을, 그 사이에 본문(1:12-12:7)을 위치시킨 것입니다. 또한, 원문에서 ‘헛되고 헛되니’는 두 개의 명사로서, ‘전도자가 이르되’ 보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동사가 서두에 위치하는 통상의 히브리 구문 상, 허무의 절대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헛됨’의 원어는 ‘헤벨 = 수증기, ‘호흡’’이며, 여기에서 ‘실체가 없음’ ‘덧없음’ ‘허무함’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과 같은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좋은 예가, 인생이 덧없으니 자신이 죽도록 놓아달라는 욥의 탄식(욥7:16)과, 우상의 헛됨은 그것이 나무조각과 돌조각 금속조각일 뿐이지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함(신32:31)을 의미할 때입니다. 더 나아가, 본절은 ‘헤벨’이 단수형태로 세 번, 복수형태로 두 번, 도합 다섯 번이나 사용되어 하나님을 떠난 삶의 절대 허무가 더욱 강조됩니다. 전도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솔로몬은 우상숭배까지 행하여 이 허무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술, 철학, 우상숭배, 할렘을 통한 쾌락, 사업, 무역, 건축 등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무의미 하였고, 오직 주어진 삶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만이 옳은 삶임을 실토합니다. 이 같은 고백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만 경외하고 살도록 동기부여를 받게 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7)

고고학으로 읽는 성경
역대상22:4절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레바논 남부 지역은 성서시대에는 시돈, 사르밧, 두로과 같은 도시국가들이 존재하였으며, 신약 시대에는 베니게(Phoenicia)로  알려졌습니다(행11:19;15:3). 수공업과 해상무역에 뛰어난 베니게인은 가나안 사람 중 이스라엘과 가장 빈번히 교류하였으나, 가깝고도 먼 이웃이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궁궐이나, 하나님의 성전을 준비하거나 건축할 때, 이들은 백향목과 기술자 등 수많은 물자들을 보내어 도움을 주었습니다. 긍정과 부정이 다 담겨 있습니다. 첫째, 이는 물자가 풍부한 곳에서 없는 곳으로 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입니다. 종교와 인종이 담이 될 수 없음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그들의 노력에 따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표현입니다(눅6:35,36) 둘째,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으로, 궁궐이나 성전 건축에 베니게인들의 참여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구성될 것의 예표입니다(엡2장). 문제는 이방 우상의 영향입니다. 심지어 솔로몬은 시돈의 여자와 결혼 했고(왕상11:1), 이 민족과 교류를 통한 우상숭배의 영향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이방인의 도움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편, 신약시대에 이르면, 이방인의 땅이라 불리웠던 갈릴리와 데가볼리 지역은 주님의 복음 전도 중심지가 되고, 시돈과 두로 지방 역시 그 영향권에 들었습니다(막7:24-37). 우리는 우상숭배의 교훈을 잊지는 말되 그리스도의 복음의 눈을 갖고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새번역)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인내
창세기3:17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4차 산업혁명은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디지털, 바이오, 물리학 등의 기술영역 경계가 융합되는 기술혁명입니다. 초연결, 초지능, 융합학에 의해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지능화된 사회로 변해 가며, 인공지능과 ICBM(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서비스, 빅데이터, 모바일) 기술의 성숙 및 데이터 중심의 산업구조로 급속히 변혁 중이며, 양자기술의 발전 또한 괄목합니다. 머리 겔만(1929-2019, 노벨물리학상)이 “양자역학을 모르는 사람은 금붕어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분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뒤 떨어지지 않아야 하지만, 이렇게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으면 안심이 됩니다. 그분이 만유를 정리하도록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하셨기 때문입니다(마28:18; 엡1:10). 그러나, 인간들은 “그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큰 불행입니다! 양자역학을 모르면 금붕어와 다름 없다는데, 하물며 양자역학을 만들어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얼마나 더 무지하겠습니까? 인간은 그 무지의 대가를 범죄, 전쟁, 질병, 사망, 학대 등으로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길입니다. 물론 신자도 척박한 삶 때문에 고민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도움을 생각하면 염려는 사라집니다(마6:33; 롬8:37). 성도의 믿음과 인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의 뜻은 열매를 맺고 그분의 살아계심이 증거될 것이며, 이것이 우리 수고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