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10/14 – 18)


잠언31:28절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일어난다”는 것은 예의를 다하여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며, 남편의 칭찬은 비교급 형식을 띤 최상급입니다(29). 고희연 빈객들 앞에서처럼 가족은 모두 ‘현숙한 여인’에 대한 최상의 감사와 칭찬 그리고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아내로부터 증거를 받기 전에는 그분에 대한 칭찬을 믿지 않습니다”(조지 화이트필드)는 말이 있듯이,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참된 삶이라고 평가될 것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사람의 삶을 속속들이 아는 자들로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우리의 행위를 증언을 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좋은 이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실되고 의로운 일생을 보냈다 하겠습니다. 4세기 말 교부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가 떠오릅니다. 어거스틴은 “나의 어머니는 남편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주인을 대하듯 하였고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렇듯 섬기는 일을 통해 여인의 덕성을 남편에게 보여주었고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를 아름답게, 존경을 받게 하였으며 남편의 칭찬을 듣게 하였습니다”(고백록). 정반대의 여인들도 있습니다. 남편 아합 왕을 충동하여 온갖 악을 저지르게 했던 이세벨(왕상18장 이하), 권력을 위해 남유다 왕국을 피로 물들였던 이세벨의 딸이자 왕후 아달랴(대하22:10-12), 침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한 헤로디아와 그 딸 살로메 등이 그 장본인 입니다. 한편,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아내입니다. ‘현숙한 여인’처럼 남편되신 그리스도께 칭찬을 듣고 우리 믿음의 자녀들에게 존경받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잠언31:29)

잠언31:30절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새번역)

30절과 31절은 10-29절의 요약이며, ‘현숙한 여인’이 칭찬받는 근원을 밝힙니다. 첫째는 주님을 경외하는 삶이요(30), 둘째는 그에 대한 주님의 보답입니다(31). 잠언은 이 두 요소를 강조하려고, 먼저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고운 것’이란 ‘매력적인 것’을 뜻하나 ‘거짓되다’고 평가합니다. ‘거짓’은 우상의 헛됨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렘10:14). 이어 등장하는 ‘헛되다’의 원어는 ‘수증기’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수증기는 처음에는 피어 오르지만 이윽고 사라지는데, 아름다움은 우리의 눈을 끌지만 세월에 따라 없어지는 것이 꼭 수증기와 같습니다. 즉, 외형의 아름다움은 매력적이라 사람들이 우선 주목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주의를 당부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할까요?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이것이 현숙한 여인이 보여준 칭찬 받는 행실의 근원임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뿌리를 내린 여인의 삶은 가사 관리, 경제 활동, 고결함과 높은 도덕성으로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여인의 가치는 진주 보다 훨씬 값지다 하겠습니다(10). 따라서, 현숙한 여인의 성공적인 삶의 비결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임을 새기고, 자녀들에게 “주님을 경외”하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며 모범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3,4)

잠언31:31절
“아내가 손수 거둔 결실은 아내에게 돌려라.  아내가 이룬 공로가 성문 어귀 광장에서 인정받게 하여라.”(새번역)

현숙한 여인의 성공 비결 두 가지 중, ‘주님에 대한 경외’는 앞에서(30) 논하였고, 본절은 ‘노력에 대한 주님의 보답’을 언급합니다. 전단은 ‘현숙한 여인’은 자신의 노력이 열매를 맺고, 그 결과물을 누리는 축복의 선포입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결실을 맺어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질병, 사망, 수탈-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그 여인을 돌보셔서 수고의 열매를 향유토록 하셨습니다. 시편128:2절의 축복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실로, 성도들의 특권 중 하나는  “우리 손이 수고한 만큼 벌고 이를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착되어진 재산, 지위 등에 만족하면서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충만하게 받았고, 주님은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히13:5). 후단은 ‘현숙한 여인’이 받는 존경의 축복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경외하는 자를 높이신 것으로 그 수단은 덕행입니다. ‘성문 어귀 광장’이란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곳이며, 그녀의 덕행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여성이 이처럼 칭송을 받는 것은 흔하지 않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당시 여성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마치 남편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 받은 것입니다. 끝으로, “현숙한 여인”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를 뜻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켜 지혜로운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계22:12,새번역)

요한복음16:28절
“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긍정적입니다. 등산을 비유로 설명하자면, 우리들은 설령 정상이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정상에 오르려 하는 등산가와 같다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삶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을 초월하는 세상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 밖에 계시지만 인간의 삶 전체에 의미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그림 밖에 있지만 그림에 균형을 가져다 주는 ‘구도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구도점은 작품 내에서 시각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점입니다. 비록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그림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고, 시각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작품의 요소들이 균형을 잡고, 안정감을 갖습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구도점은 작품 전체의 조화를 이끌어내는 포인트입니다. 인생을 균형잡고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 그분에게, 우리는 “예!”라고 대답하며 힘차게 긍정합니다. 이에 반하여 인생을 오직 인간적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까지 인간의 체험을 갖고 설명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주장도 하지만, 잘못되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의 표상은 큰 관계가 없음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을 통해서 보려는 태도는 마땅히 버려야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시편14:1,새번역)

마태복음 19: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삶의 의미는 행동 없이 생각만으로는 찾지 못합니다. 삶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가라! 팔아라! 주어라! 오라! 따르라!” 이 말씀을 실천하면 삶의 의미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믿음의 체계 그 이상입니다. 이는 삶의 양식, 곧 책임 있게 자신을 투신하는 행동 양식이요, 하나님 아래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행동 없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겨 있고,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에게만 나타납니다(마11:25). 주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실 책임은 그분의 고유한 개인적 책임입니다. 그 책임을 받아들신 후, 주님은 겟세마네의 고통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 주어지는 자유를 발견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육신 하신 삶의 의미를 확정하였습니다.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만이 져야 하는 ‘고유한 그리고 개인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교회, 사회 등에 대한 책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책임과 희생을 받아들여야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즉 섬김을 실천할 때 비로소 얻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겠다고 결심한 순간, 겟세마네의 고뇌로부터 놓여 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자유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같이,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주어지나, 삶의 의미는 그분의 뜻을 행한 뒤에야 얻게 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갈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