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26절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현숙한 여인이 행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성취를 다룬 잠언은, 본절에서 그런 성취를 가져오게 한 영적 도덕적 가치를 언급합니다. ‘입’은 ‘그녀의 입’을, ‘그의 혀’는 ‘그녀의 혀’로서 원문은 시작과 끝에, 그 중간에는 ‘지혜’와 ‘인애의 법’을 배치함으로 내부가 강조된 교차대구법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26절의 중심은 ‘지혜를 베푸는 것과 인애의 법을 말하는 것’에 있습니다. 전단의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는 언어생활의 지혜로움을 뜻합니다. 지혜는 휼륭한 유산과 같이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솔로몬은 ‘무엇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가르칩니다. 언어생활도 같습니다. ‘때에 맞는 말은 은 쟁반 위에 아로새긴 금사과’와 같습니다. 바울 역시 ‘오직 덕에 소용되는 대로 필요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사역)고 명령합니다. 신자의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하며, 기도와 많은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이 분야에서 탁월한 명성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후단의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는, 자비하고 인자한 태도로 자녀와 종들을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모습입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사람 마다, 동의가 되고 마음은 은혜로 가득찼을 것입니다. 한편, ‘법’은 모세오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토라’를 지칭합니다. 따라서, ‘인애의 법’이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의 도를 말합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 만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알기에, 본절은 참된 제자들의 전형적인 삶을 묘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잠언31:27절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27절의 첫 단어는 ‘보살피다’를 뜻하는 ‘차파’로서, 히브리어 18번째 자음( ‘차데’)로 시작됩니다. 알파벹 시인 ‘현숙한 여인’의 찬가는 18번째(10∼27절) 이르렀고, 이제 4 개의 자음만 더 나오면 끝 날 것입니다. ‘차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낱낱이 둘러보심(15:3), 혹은 파수꾼이 적들의 동태를 예의주시함(삼상14:16)을 묘사하기에, 집안 대소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다스리는 여인의 태도가 떠오릅니다. 후단의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를 직역하면 ‘그녀는 게으름의 빵을 결코 먹지 않는다”입니다. ‘게으름의 빵’이란 일하지 않거나, 불의한 소득을 상징하므로, 이 여인은 부지런하고 정당하게 일하고 살아 갔습니다. 실로, ‘현숙한 여인’은 노동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정직과 진실에 기초하여 경제 활동을 수행해 왔으며, 그런 성격의 소유자는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게으르게 살아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녀는 누구도 게으름의 빵을 먹도록 허용치 않는다”(스코트)고 해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이 같이, 27절은 가정과 경제 활동의 특정부분을 다루지 않고,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된 ‘현숙한 여인’의 성품을 요약한 뒤(전단), ‘정직한 삶’의 결정적인 결과물을 적어 강조합니다(후단). 진정한 지혜란 단순히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격에 내재되어 삶으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잠언의 교훈이며,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 받는 믿음을 가진 자의 삶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에서 그는 ‘지혜자’로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
마가복음5: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빅터 프랭클은 정신분열증 환자(60세)의 사례를 보고합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환청을 들어왔고 바보 취급당했습니다. 지나치게 흥분하는 때도 있었지만, 자기 누이동생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감정을 조절할 줄 알았습니다. 프랭클은 누구 때문에 자신을 조절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사랑하는 누이동생가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요!”라는 뜻밖의 말이었습니다. 환자는 정신분열증을 앓는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랫동안 귀신 들려 고통받은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후 당신을 따르고자 하자, 오히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자비의 빛으로 삶을 깊이 돌아보도록 권면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거라사의 광인과 같이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사람의 문제로만 보아서는 이해도 해결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광인이 주님의 능력으로 고침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를 보고 이유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그는 일생 주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결심이 인격의 중심에 자리잡는 현상입니다(벧전3:21). 사랑을 받은 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 사라졌던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그 따슷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재창조된 인간입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누가복음3:8절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심리치료(요법)’란 심리적 문제를 심리치료 전문가와의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면서 자기 이해에도달하나, ‘의미치료(요법)’은 환자의 세계관을 재조정하여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과정입니다. 빅터 프랭클에게 명석하나 선천성 우울증에 자주 빠지는 여교사가 찾아 왔습니다. 처음에는 약을 처방하여 신체적 치료를 시도하였지만, 그 우울증은 심리적인 문제에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심리치료를 도입하자 이 환자는 갇혀 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비하감, 삶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빈곤감 등을 모두 내려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녀는 운명적인 우울증의 재발로 무력증에 빠져 음울하게 살아 왔었습니다. 프랭클은 “가능한 한 우을감을 무시하라”고 지시하면서, 그녀를 ‘로고테라피(=의미요법)’의 치료 영역으로 이끌었습니다. 프랭클은 실존분석(존재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환자에게 발생하는 운명적인 우울증에 스스로 도전하도록 깨우쳤습니다. 그 여교사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고 훨씬 책임감 있게 살아가게 되자,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을 써 보냈습니다. 탕자는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제정신이 들었을 때)’(눅15:17, 사역), 자신이 설정한 쾌락 중심적 삶의 문제점을 깨닫고 책임성 있게 그것을 고치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돌이켜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같이 ‘하나님을 향해 살겠다는 마음의 결단’은 회개의 본질입니다. “침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벧전3:21,새번역)
시편40:8절
“나의 하나님, 내가 주님의 뜻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법을 제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새번역)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질병과 치유를 함께 생각하면 대답이 좀 더 쉽습니다. (1) 인간을 순전히 생물학적 유기체로만 볼 경우, 유기체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할 때는 약물과 수술로만 고치고자 할 것입니다. (2) 인간 존재를 어떤 심리적 장치로만 파악할 경우, 심리학적 상처(트라우마)를 밝혀내는 일에 기반을 두고 치료할 것입니다. (3) 인간 존재를 단지 영적(or 정신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경우, 삶에 대한 의미를 중심에 두기 때문에 환자의 가치 체계 훼손이 질병이라 간주하고 치료할 것입니다. 따라서, 치료는 상기 3가지 차원이 모두 고려되어야 하나,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설명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없이도 삶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육체적 질병(맹인, 열병, 나병 등), ‘심리적 질병(죄로 신음하는 중풍병자), 영적·정신적 질병(거라사 광인), 그리고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고르반 제도를 통한 부모공경 계명을 왜곡한 바리새인의 가르침)를 모두 고치셨습니다. 몸의 질병은 기적적인 치유로, 과거의 죄로 신음하는 심리적 고통은 죄 사함을 주심으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영적·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는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밝혀내고 교훈하심로 바로 잡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고의 틀 내에서 행동하도록 가르치신 점입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요8:31,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