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24절
“그는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
31:13-23절에서는 현숙한 아내의 유능하고도 성실한 활동과 그에 따른 복된 결과를, 24절부터 29절까지는 같은 내용을 반복합니다. 그 중 본절은 이 여인의 경제 활동 즉, 생산과 사업의 성과를 알려줍니다. ‘베로 옷을 지어’는 ‘세마포’ 혹은 ‘베로 만든 겉옷’으로 번역되나, ‘고급 속옷’으로 보입니다. ‘띠를 만들며’는 ‘허리띠’를 의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통으로 짜여진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옷을 고정시키거나 옷맵시를 위해 허리띠가 필수품이었습니다. 통상 가죽으로 만들었으나 보석이나 금으로 장식된 값비싼 것들도 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 물건들은 일차적으로 가족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나, 이 여인은 더 많이 생산하여 상인들에게 판매하였습니다. 조선중기(16세기)는 양잠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이황(퇴계, 1501-1570)의 어머니 박씨는 여덟 남매를 혼자서 농사와 양잠으로 키웠습니다. 누에 사육은 여인들의 농가부업이었고, 세심한 주의와 관리를 요하였습니다. 그러나 퇴계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양잠에 관한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만큼 퇴계는 양잠산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18세기가 되면 사대부들도 참여하였다고 하니, 퇴계의 관심은 2백년이나 앞섰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퇴계는 성리학에 전념하였지만, 가정 경제도 소홀하지 않고 균형 잡았습니다. 아담(사람)은 동산관리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손이 주께서 주신 일을 발견하면, 무엇이든지 힘을 다해 수고해야 합니다(전9:10).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11:6).
잠언31:25절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
현숙한 여인은 눈이 와도 염려하지 않았는데(21a), 본절에서는 닥칠 수 있는 어떤 역경도 비웃고있습니다. 본문의 ‘옷을 삼고’에 해당하는 ‘레부솨흐’는 ‘의복’이라는 의미의 ‘레부쉬’와 3인칭 여성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따라서 ‘능력과 존귀는 그녀의 옷이다’로 직역됩니다. 구약에서는 옷을 매개로 사람의 특성과 성품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추위를 대비하여 가족들을 홍색 옷으로 입혔지만(21a), 그녀 자신의 옷은 ‘능력과 존귀’입니다. ‘능력’에 해당하는 ‘오즈’는 ‘힘’ 즉,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에너지를 뜻합니다. ‘존귀’란 ‘아름다움, 화려함, 위엄’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그녀를 동료들 위에 놓게 하는 위엄을 보여줍니다. 그녀에 대한 칭찬은 이 이상 높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년과 노인 세대가 갖는 장점(예: 20:29절의 ‘능력과 존귀’)을 모두 그녀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입니다. 후단의 ‘후일을 웃는다’는, 적을 조롱하는 승리자와 같이 그녀는 미래에 닥쳐올 역경들을 비웃습니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새번역)로 해석되지만, 70인역이나 라틴역과 같이 “마지막 날에 기뻐한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숙한 여인은 생존 시에는 모든 과정을 힘차고 고결하게 살아갔고(전단), 죽음이 임박할 때 결코 두려워 하지 않고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후단)의 묘사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31:30). 본문은 믿음의 여인의 아름다운 일생을 단지 6개 단어(히브리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28:28).
누가복음1:10절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사가랴에게 나타나서, 분향하는 제단 오른쪽에 섰다.”(새번역)
본문은 BC 5년 경, 제사장 사가랴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는 중 일어난 사건입니다. 제단 우편에 천사장 가브리엘이 나타나 늙도록 자녀가 없던 사가랴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사라집니다. 이 ‘좋은 소식’(복음)을 믿고 집으로 돌아간 사가랴는 늙은 아내 엘리사벳을 통해 침례 요한을 낳게 됩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난 사건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런 영적 경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돌보셨다는 은혜를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은혜의 체험을 갖게 되면, 놀라운 황홀경, 기쁨, 평강 등을 또 경험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은혜를 간직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책임을 다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등장하는 거라사 광인도 같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 자신을 괴롭히던 군대 귀신들로부터 자유함을 받습니다(1-20절). 이 은혜를 받자 그는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고자 함께 머무르도록 요청합니다.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를 주신 이유는, 그를 온전하게 하사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이전의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의 임무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생활 방식, 삶의 자세는 완전히 바뀌게 되며, 삶이 변화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합니다. 그를 보고 들은 주 변 사람들은 모두 놀랄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이요 복음의 전도입니다.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다. 그리하니 사람들이 다 놀랐다”(막5:20,새번역)
누가복음 22:24절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오늘 본문은 최후의 만찬 중 일어난 제자들 사이의 다툼입니다. 주님은 친히 그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요13장). 주님의 혁명적인 가르침 중 하나는 ‘위대함은 섬김에서 나온다’는 교훈입니다. 주님은 마귀의 유혹을 받으실 때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분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선포하시고, 공생애에 임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항상 주는 삶이요, 섬김의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시가 떠오릅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편37:21). 체포당하기 직전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십자가 상에서는 회개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허락하셨습니다. 많은 삶의 방식이 있으나, “섬김이란 삶의 방식”이 단연 최고입니다. 섬기면 낮아지고, 손해도 보겠지만, 주님이 높이실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주님을 높이신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오는 세상에서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막10:30).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좋은 예입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다만, 섬김의 분야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섬기고자 하는 일에 적합한 은사, 기술 혹은 경험을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때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롬12:3). 겸손과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지혜롭게 되어 있습니다만, 지혜가 부족하거든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3:22).
마태복음5:22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새번역)
‘기우(杞憂)-기나라 사람의 근심’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입니다. 기우가 지나치면, 신경증으로 발전합니다. 따라서, 신경증의 고통은 대부분 잘못된 견해에서 나오지만, 그들은 제멋대로 설정해 버린 그릇된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 상반되는 요구들을 통합시키지 못하고, 기차만 타고 다니거나(고소공포증), 아예 집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광장공포증). 고소공포증이란, 안전이 보장된 높은 장소에서도 발작을 일으키는 정신병으로, 직접 창문너머로 밖을 보지 않아도 극심한 공포를 느낍니다. 광장공포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자신이 쉽게 탈출할 수 없거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두려워하여 넓게 탁 트인 공간을 무서워합니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특히 과학시대의 교육을 받은 신경증 환자들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결정론의 오류에 쉽게 희생당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깨달아도, 더 이상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운명이나 환경에 내맡긴 채 살아갑니다. 이들의 세계관·인생관은 분명히 교정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들고 오셨을 때 행하신 일이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니다. 부자 청년, 사마리아 여인, 마르다,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주님은 이를 분명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자기 중심에서 예수 중심으로 삶의 혁명적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