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9/23-27)

잠언31:22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숙한 여인’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불’ ‘세마포와 자색 옷’은고대에  부자들이나 권력자들만 사용하고 입는 고가품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숙한 여인’에게는 사치품이라기 보다는 품위 유지를 위함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익힌 훌륭한 직조 기술로 침대용 이불과 아름다운 옷을 짜고 사용합니다. ‘이불’은 복수로서, 침대를 부드럽고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7:16참조). 그녀의 옷은 농업과 축산에서 나온 최고급 직물로 만들어졌습니다. 31:13에서 아마(린넨,삼)로 옷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본절로 들어오면 ‘세마포(고급 린넨)’로 발전합니다. 고급 린넨은 통상 이집트로부터 수입되었는데,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자 입었던 바로 그 옷입니다(창41:42). 또 ‘양털’(13) 대신 ‘붉은 보라색으로 염색된 양털’을 옷의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역시 전통적으로 수입품이었습니다. 이 붉은 염료는 페니키아 해안에 있는 조개 껍질에서 추출하였기에 비쌌고, 따라서 부와 사치품의 상징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가 이 염료로 염색한 직물을 판매하였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녀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이게 하셨고, 그녀와 온 가정이 침례를 받습니다(행16:14). 루디아의 집은 빌립보의 첫 번째 교회였고, 루디아는 신약판 ‘현숙한 여인’입니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딤전4:8,새번역)

잠언31:23절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당시 성문은 사람들이 모여 공적인 일을 논의하거나 재판하는 장소로 장로들이 주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정 이전에는 장로들의 권위 하에 각 공동체의 질서가 세워졌고(룻4:1-12), 또한 장로들은 외부 세계에 대하여 공동체를 대표하였습니다. ‘그 땅’이란 ‘성문’과 병행구절로서, 그들의 영향력이 공동체를 넘어 더 큰 영역으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았다”는 말은 그녀의 남편이 공동체 가운데 인정 받아 명성을 지녔음을 보여줍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들면, ① 아내의 도움을 받아 가정은 평안하고 번영하였습니다. ‘가화만사성’이지요. ② ‘인정을 받으며’의 원어는 ‘노다’이며, 이는 개인적 접촉을 통해 경험해 안다는 ‘야다’가 어근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은 그 남편의 명철함을 경험해 알고 있었고, 장로들과 함께 재판석에 앉을 만큼 존경받았습니다. ③ 아내된 ‘현숙한 여인’이 준비하여 입힌 ‘홍색 옷’(21b)과 같은 고귀한 의복도 명성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④ ‘현숙한 여인’은 ‘그 행한 일 때문에 성문에서 칭찬을 받는다’(31)고 한 것 같이, 그녀의 성품과 천재성은 남편의 머리에 씌여진 면류관입니다(잠언12:4). 실로 ‘현숙한 여인’의 값은 진주보다 더 귀합니다(31:10). 한편, 어떤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은 성도들을 상징하는데, 교회는 주님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올바른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마5:16), 주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고린도전서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빅터 프랭클의 우울증 환자였던 여교사의 글입니다: “저는 선생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은 “삶의 의미”를 못 찾고, 이에 따른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지 못 하는 병입니다. 삶의 의미는 창조적 가치, 체험적 가치, 자세적 가치의 실현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프랭클). 인간이 운명에 대처하는 자세 자체가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자세적 가치). 결국 ‘자세적 가치’는 가치괸, 철학, 혹은 신앙으로 불리워지는 정신적·영적 요소와 관련이 있습니다. 프랭클은 말합니다. “강제수용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삽질 밖에 없고, 체험할 수 있는 일은 징벌과 굶주림과 추위뿐이었다. 그래도 인간에게 본질적인 자유가 남아 있고 자세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앞에서 인간은 자유롭다…이 자유는 어떤 조건도 부인한다. 그것은 ‘모든 상황 아래서’ 그리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되는 자유다”. 프랭클은 전문직에 종사하다 죽을 병에 든 어느 청년의 사례를 언급하며 주장을 뒷받침합니다.(청년의 사례는 내일 묵상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이를 훨씬 뛰어넘는 가치와 모범, 그리고 소망을 제시합니다. 복음은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리스도 속으로 침례를 받아 함께 죽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으니 이제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종들로 살아가라”는 믿음의 자세, 주님의 훌륭한 모범, 그리고 이를 본받은 사도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갖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5:5)

요한일서3:23절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한 청년이 수술이 불가능한 척추종양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신이 점차 마비되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직업을 그만 두었고,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창조적 가치)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체험적 가치들을 실현하는 일, 예를 들어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으며 다른 환자들을 만나 서로 격려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이러한 활동까지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마비되었을 때, 그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를 자세적 가치에서 찾았습니다. “이제 그는 자기 동료 환자들을 상담해 주는 역할을 자임하였고 최선을 다해 귀감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용감하게 참아냈다. 죽음을 하루 앞둔 날, – 그는 그것을 예견하였다 – 그는 당직 의사(빅터 프랭클)가 밤중에 모르핀을 주사하도록 지시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 오후 진료시간에 그 의사가 회진 왔을 때 청년은 저녁에 주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의사가 주사 때문에 한밤중에 일어나지 않게 하고 그래서 충분한 수면을 취하도록 하는 배려였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는 말씀에 내포된 의미를 훌륭하게 실천한 대목입니다. 물론, 이 청년이 그리스도인인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불신자라도 프랭클의 의미요법, 더 나아가 상기 황금률에 감탄하여 그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이로써 구원받지는 못하더라도 아름다운 덕으로 칭찬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주님의 뜻을 실천할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권리를 선포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마가복음1:15절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자신의 불치의 병을 우연히 알게 된 저명한 한 젊은 수학자의 편지입니다: ‘나는 나의 도전적 정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갖게 되었네요. 이 투쟁에서만큼은 애초부터 승리의 문제가 배제되어 있지요. 차라리 이 투쟁은 남은 기력의 마지막 소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이유 없는 투쟁이라고요? 우리 시대의 철학 서적에서는 이 말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투쟁 그 자체가 중요하답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이유도 상실될 수 없습니다…..저녁에 우리는 안톤 부르크너의 교향곡 4번 Romantic Symphony를 감상하였지요. 온 인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우주적 장엄함이 나를 감쌌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값싼 감상주의에는 틈을 내주지 않을 겁니다”(「의사와 영혼」빅터 프랭클). 이 수학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세적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창조적 가치나 경험적 가치들도 멘토의 도움이 요청되지만, 자세적 가치의 경우는 필수적입니다. 그 만큼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의 전환이 어렵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는 38년 간 누워 있었다가 고침 받았으나, 후에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는 예수님의 경고를 받자, 오히려 안식일에 자신의 병을 고친 이가 예수임을 고발합니다. 주님이 베푸신 기적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세적 가치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결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자세를 바꾸는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천국도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