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9/2-6)

잠언31:16절
“밭을 살펴 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16절은 ‘현숙한 여인’의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묘사합니다. ‘살펴 보고’에 해당하는 ‘자메마’는 ‘생각하다, 숙고하다, 계획하다’는 의미로써, ‘현숙한 여인’이 구입하려고 밭의 상태와 경제성 등을 신중하게 따져보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모든 각도에서 생각해 본 뒤, 대담하게 자금을 집행하여 구입합니다. 자금의 출처는 어디이겠습니까? ‘자기의 손으로 번 것’입니다. 원어는 ‘그녀의 손바닥의 열매’로서, 열심히 손으로 일하여 직물을 생산하고 팔아 얻은 소득을 말합니다(31:13,24). “포도원을 일구며”는 먼저 땅을 갈아 엎고, 돌을 전부 골라내어 울타리와 쓸만한 밭을 만든 후에, 최상의 포도나무를 심고, 원두막과 포도주 틀을 세우는 과정을 지칭합니다. 10년은 노력해야 좋은 포도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한 우물을 10년은 파야 일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표 판매원 등과 같이 노력해도 기술이 늘지 않는 일은 청년들이 택할 직업이 못 됩니다(버트란트 러셀). 노력해서 도달할 장래가 없는 것이죠! 현숙한 여인은 그 반대입니다. 한편, ‘산다’의 주어는 ‘현숙한 여인’입니다(여성 대명사).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회에서 땅의 구매와 같은 일은 가정의 중대사이기에 가장이 맡아 처리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는 문서상으로는 가장이 밭의 소유주로 등재되었을지라도 그 과정에 여인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회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현숙한 여인’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 하겠으며, 이는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의 경제적 측면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는다”(잠언31:30,새번역)

잠언31:17절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토마스 모어의 책「유토피아」(1516년)에서는 모든 주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생산물은 다 공동체에 귀속되며 개인은 공정한 분배를 받기에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없고, 모두 부유하다고 합니다. 꿈 같은 이야기지요! 왜냐하면 사유재산제도가 없는 그 사회에서 어떻게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공정한 분배를 행할 수 있는지 토마스 모어는 적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산성 향상과 더불어 공정한 분배는 오직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래서 잠언은 31장 10절이하에 현숙한 여인을 등장시켜, “사랑의 모범”이 작동하는 가정을 꿈꾸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일어선다는 뜻입니다. 또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에서 ‘팔’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현숙한 여인이 가정을 위해 강한 의지를 갖고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을 표현 합니다. 사실 그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 여종들에게 일을 나누어 주고, 밭과 포도원에서 일한 뒤, 밤에도 물레질을 합니다. 그런 불굴의 동기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가정 즉, 남편과 자녀들 그리고 남녀 하인들을 맡겨주셨음을 알고 책임감을 갖습니다. 그녀의 관심사는 단순히 자신을 치장하고 안일하게 사는 길이 아니라, 맡겨진 가정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삶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 어머니, 며느리, 여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이고, 경외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놓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그 비결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12:35).

마태복음26: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인간 관계는 개방적이고 정직해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당신의 임박한 체포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와 보니 그들은 잠들었습니다. 주님이 안타까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려 도움을 요청하는 가나안 여인의 부르짖음에, 제자들은 감정을 감추지 않고 그 여자를 돌려보내라고  예수께 불만을 토로합니다. 솔직함은 상담에서도 중요합니다. ‘터니어’는 대인 관계에서 순수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나는 진찰실에서뿐 아니라 길거리의 가장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타인에게 보다 개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따뜻한 인간성을 갖도록 도와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이 마치 신선한 미풍처럼 우리 가운데에서 불어나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의사는 자신이 심하게 화를 낸 다음에 생겼던 변화를 말합니다: “전에는 내 직무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호메로스의 시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분노 때문에 한 인간이 되었고 호메로스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 그리고 그분이 친밀하게 만나셨던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솔직한 대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어떤 행동에도 주님은 언제나 현재의 모습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시는 장면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포용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갖도록 성령께 도우심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롬8:14,사역)

누가복음10: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체험적 가치의 실현은 삶의 의미 발견을 위한 또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이 방문하자 잘 대접하려는 마음에 마르다는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오히려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에 마르다는 주님께 불평하였으나, 주님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왜일까요? 본문은 선한 사라미아 사람의 비유 다음에 위치합니다. 거기서 제사장, 레위인은 도움이 필요한 동포를 지나치는데, 거룩을 요구하는 제사 직분을 핑계 삼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당장 죽어가는 유대인에게 향합니다. 늘 하는 제사 직분(창조적 가치 실현)과 강도당한 이웃의 간호(체험적 가치 실현) 사이에 바른 선택, 즉, ‘삶의 의미의 실현’은 무엇이겠습니까? 후자입니다. 물론 주님은 창조적 가치의 실현- 제사장의 역할, 음식 대접 등-을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창조적 가치’만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유일한 영역은 아닙니다. 어느 가정주부는 세 자녀를 거느린 진부한 가사일을 불평하는데, 바로 “많은 일을 염려하고 근심하는” 마르다와 비슷합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올바른 자아실현의 방향을 잡고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같이 “체험적 가치의 발견”은 경험이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보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후에 마리아는 옥합을 깨어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림으로, 주님의 장례를 준비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로마서 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보편적 방법은 자신의 일 – 가사, 공부, 근로, 사업, 학문, 예술 등 -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만남, 배움, 경험(황혼의 아름다움 등) 따위를 통해 체험한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어느 실내장식 화가(61살)와 상담한 내용입니다. 그 화가는 신경질환이 악화되어 자신이 사랑해왔던 일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무심코 체험적인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가 더 이상 창조적인 가치들에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난 날 자신의 직업을 통해 거둔 성공, 현재도 활발한 예술적 감수성,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에 대하여 고마움을 느끼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현재 추구하는 지적인 탐구- 강의, 읽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 -에 집중하면서 상담하였다.” 그 결과 손작업으로 더 이상의 예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삶에도 여전히 의미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자 그 화가는 강인해 졌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체험하는 일보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더 중요합니다. 마르다에게 마리아가 택하였던 “좋은 편”(눅10:42)이란, 마리아가 추구한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입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주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원기회복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셨지만, 그분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더 필요하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깨닫고, 주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롬14:19절,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