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14절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본문은 ‘현숙한 아내’를 무역선에 빗대었습니다. 지중해 해상무역은 히브리인이 아니라 페니키아 상인들이 주도하였고, 두로와 시돈은 그 때문에 번영하였습니다. 무역을 통한 부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현숙한 아내’의 행동을 묘사하는 것은, 그 만큼 진취적으로 가정 경제를 일구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라는 표현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실 돈을 버는 것은 남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데, 그 고대에 여자가 무역을 통해 필요한 양식을 들여오는 모습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지혜를 가진 모든 여인들의 삶이 그와 비슷하였습니다. 1525년 결혼 후, 마르틴 루터 부부는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규모의 살림을 유지하였습니다. 선제후(選帝侯) 요한 프리드리히는 방 40개가 딸린 수도원을 루터에게 결혼 선물로 주면서, 교수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고 결혼 축하금으로 140굴덴이 들어 왔지만- 소 한 마리에 2굴덴 – 살림은 빡빡하였습니다.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컸고, 루터는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남편이었습니다. 수많은 식솔의 식사 준비와 빨래 등 뒤치다꺼리는 온전히 카타리나의 몫으로, 닭과 돼지를 치고 채소를 심은 것은 물론 수녀원에서 배운 양조 기술로 맥주를 빚어 팔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재(理財)에도 능해 어려운 살림에서도 돈을 모아 부동산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면, 책임감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언31:30)
잠언31:15절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14절은 ‘현숙한 아내’가 부족한 물품을 외부로부터 구입하는 적극적인 노력과 진취적인 자세를 묘사하였지만, 본절과 16절은 가정을 다스리고 경제활동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14절은 ‘무역선’ 의 이미지로 표현하나, 본절은 ‘먹잇감을 주는 암사자’의 이미지입니다. ‘밤이 새기 전에’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녀는 아직 밤인데 일어난다’입니다. 암사자는 밤에 사냥을 합니다만, ‘현숙한 아내’는 가족을 사랑하고 재산을 불리고자 모두 자는 밤중에 일어나 하루를 대비합니다. 책임감을 실천하는 근면의 화신으로, 자신의 안락보다 가정의 복지를 염려하는 그녀의 성품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근면 성실해야 하는데, 가정의 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식’은 ‘테레프’의 번역으로, ‘테레프’는 ‘먹잇감인 짐승을 잡아 그 고기를 찢어 먹는다’는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절은 ‘현숙한 여인’을 포식동물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새끼들에게 ‘먹잇감’을 주듯이, 범접 못하는 위엄을 갖고 전투적으로 가정을 돌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맥그리쉬는 말합니다: “최소한 이 단어는 큰 힘과 기량과 독창성을 발휘한 후에만 얻을 수 있는 식량을 나타내며, 큰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아내의 특별한 능력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주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의 법을 심중에 간직하고(30), 또 지혜로워 각 여종들에게 분배할 적합한 일의 종류를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정은 생산적이고 질서 있게 돌아갑니다. 잠언을 가르치는 솔로몬과도 같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슬기를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주기 위함이다.”(잠언1:4,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7:50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인격적 성숙의 길은 자아실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벗어나 분명한 윤리적 책임감을 갖고 투신하는 것인데, 올포트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합니다. (1) 자기 객관화(자기분리)의 길 (2) 관심사를 넓히는 길 (3)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으로 나가는 길. 첫째, 자기 객관화로서, “한국 떠나보니 뭐가 문제인지 알겠다…부족한 연구비 따내려 밤낮 제안서만 써내고…” 어느 스위스 공대 교수(한국인)의 체험기가 말해 주듯이, 이는 관심사에서 멀어지거나, 타인(멘토 등)의 개입과 같은 계기가 필요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였습니다(눅7:36-50). 그의 바리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은 기적은 행하나 배움이 없는 사람이고, 죄인인 그 여자는 구제불가능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은 빚 탕감의 비유를 통해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시몬의 대답을 이끌어 내신 뒤, 시몬의 잘못된 행동을 반추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손님 대접에 관련된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달아야만 죄사함 받아 구원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시몬이 아니라, 죄인인 그 여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았고, 이에 향유를 붓고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인 만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둘째, 대화 내용은 쉽지만, 인간의 교만한 본성과 관련되어 있어 실천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자아를 극복하고 타인 존중이 가능합니다. 복음과 함께 성령님이 오셔야만 하는 이유입니다(롬8:4-9).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22:12).
에베소서 4: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인격성숙은 타인을 고려하는 태도에서 나옵니다. 이를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관심사를 넓히는 것인데, 관심사가 넓어지면 인격적 성숙, 치유,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의 초청을 받은 주님은 “이 여자를 보느냐”(눅7:44)라고 하심으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은 시몬에게 그녀를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온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여주신 은혜를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지만(롬3:23), 화목제물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갈3:28). 이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민족, 신분, 남녀의 차별은 없고 한 형제 자매로 존중하기에 주님을 닮은 인격적 성숙에 이릅니다. 또한, 관심사를 넓히면 치유도 일어납니다. 노인들이 은퇴하여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면, 온갖 질병이 찾아 오나, 관심사에 몰두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합니다. 끝으로, 세상은 자아실현에 몰두 하지만, 복음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라고 합니다. 이때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즉, 사람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것을 지키려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자유롭게 삶을 내줄 때 자신과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의 짐을 져야 하지만, 타인이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은 함께 져서, 그리스도의 율법을 성취해야 합니다(갈6:2). 섬김이 곧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마태복음5: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인격적 성숙에 이르는 세 번째 길은 ‘통합의 원리’입니다. 좀 더 중요한 가치를 중심으로 여러 가치들이 통합되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죄 많은 여인’(눅7:36-50)의 기사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시몬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자신처럼 종교적 본분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 죄인인 한 여인 등-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자신의 관심분야인 율법규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표가 되어 율법의 목표인 사랑과 온전함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자를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단죄한 것은(눅7:39), 그가 늘 품고 있던 불만, “왜 모세율법을 행하지 않는가?”, 을 드러낸 것이지만, 무엇인가 결여되었습니다. 사랑입니다. 따라서, 정의와 사랑을 통합한 주님의 눈에는 시몬의 삶은 율법의 목표인 ‘하나님의 영광’에 미달하였습니다. 시몬이 보는 삶의 반경이 그리 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심 분야에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철저하였지만, 그 영역을 벗어난 사람들을 죄인이라 단죄하고 교제를 끊어 버렸습니다. 그는 부족한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한편, 주님은 회개하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셨으나, 그 말씀 속에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통합하는 유일한 길은 주님을 본받는 것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목표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