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31:10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10-31절까지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찬가입니다. 형식은 답관체(acrostic)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의 첫머리가 시작됩니다. 이는 흥미를 유발하고 쉽게 암기하도록 사용된 문학적 장치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입니다. ① 현숙한 여인과 그 남편의 복(10-12) ② 현숙한 아내의 노력과 복된 열매(13-29) ③ 현숙한 아내의 핵심 덕목- 주님을 경외하는 삶(30-31). 본문의 ‘현숙한’의 원어 ‘하일’은 ‘강하다’라는 의미의 어원 ‘훌’에서 유래하여 ‘능력있는’ ‘힘있는’을 뜻합니다. 문맥을 감안하여, ‘현숙한’(개정개역), ‘유능한’(새번역), ‘어진’(공동번역), ‘고상한 성품의-noble character’(NIV) 등으로 번역되지만 ‘유능함-capable’이란 뜻이 핵심이나, 입으로 지혜를 말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남편을 세우는 고매한 인격도 증거됩니다. 따라서 이 여인은 현모양처로서 ‘현명하고 정숙한’ 아내로 이해되고, 개정개역의 ‘현숙한 여인’이란 번역이 제일 좋습니다. 남편에게는 이런 아내는 귀한 보석인 ‘진주 보다’ 값이 더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은 이런 여인을 찾아 가정을 이루고, 여자도 이런 아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교훈입니다. 이 현숙한 여인의 삶의 원동력은 주님에 대한 경외이며, 그것이 이웃(남편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낳고, 그 책임감은 재물, 지혜로운 말, 홍색 옷 등 구체적인 삶의 결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추상적이지 않고 행위와 열매로 입증되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언19:14).
잠언31:11절
“남편은 진심으로 아내를 믿으며 가난을 모르고 산다.”(새번역)
11절은 답관체 시의 형식에 따라 히브리어 두번째 알파벹인 ‘베트’로 시작됩니다. ‘믿으며’는 ‘빠다흐’의 번역이며, 신뢰할 만한 대상으로 인한 행복감·안도감을 나타내고, 마음을 뜻하는 ‘레브’와 함께 사용되어 ‘진심으로 신뢰한다’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로 직역됩니다. 남편의 신뢰의 구체적인 내용은 먼저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에서처럼 아내가 벌어들이는 경제적인 풍요함과 관련되어 있지만, 잠언은 인격과 자녀 교육, 그리고 결혼 관계에 대한 정절 등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신뢰, 그것도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아내를 둔 남편은 행복하며, 그 아내 역시 자신을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기에 복되다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입니다. 후단의 ‘가난을 모르고 산다’는 개정 개역에서는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로 번역하였는데, 직역은 ‘그리고 그는 결코 수입이 부족하지 않다’입니다. 잠언을 보면, 아내는 부지런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외부로부터 수입을 벌어들이고, 남편의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견고하게 일구어 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의 부인 카타리나(1499-155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루터가 수도원에서 탈출하도록 도운 수녀 중 한 명이었습니다. 결혼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1525년 결혼 후, 카타리나는 루터의 경제생활과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실제 표상으로, 그분의 이야기를 간간이 적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오직 선행으로 남편을 도우며, 해를 입히는 일이 없다.”(잠언31:12,새번역)
누가복음7:48절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얼마 전 하마스의 지도자 하니예가 테헤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란은 책임감과 모욕감을 동시에 느껴 즉각적인 보복을 선포하였지만,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찾아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시몬은 그 동네 죄인인 한 여자가 울며,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마음에 주님의 신분을 시험하는 시몬에게 주님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르시기를,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춤도 없었고, 흔한 감람유조차 머리에 붓지 않았지만, 그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내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머리에 부었다. 그는 너보다 나를 사랑함이 많아서, 그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다.’ 하셨습니다. 여타 손님들은 귀빈으로 영접하여 주인으로서 책임을 다한 시몬이였지만, 오직 예수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 판단됩니다. 예수께 대한 존중과 책임감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크게 모욕감을 느끼셨으나, 내색도 않으시고 온유하게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메시야로서의 책임감, 즉 당신의 백성의 죄와 연약을 담당하고 바로 잡으셔야 하는 그 책임감 때문입니다(눅4:17-22). 여인의 향유 사건이 일어나자 대화를 통해 시몬의 마음속 질문에 답하시면서, 메시야의 능력과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주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주님께서 행동하실 구원의 때를 온유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사건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 받았기 때문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눅7:49)
에스더 3: 2절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본문의 사건은 페르샤 제국 아하수에로 왕 초기(BC 480년 경)입니다. 질녀 에스더는 이미 황후였고, 모르드개는 수산 성 문지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에 대한 암살 모의를 듣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알려 참극을 막았습니다. 그는 상도 칭찬도 받지 못하였으나, 온유하게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런 중 제국의 2인자 하만의 행차 시 모르드개는 꿇지도 절하지도 않았고, 하만은 분노하여 유대 민족까지 몰살시키려고 획책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면 행복하게 살 모르드개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다가 화를 당하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히려 페르샤 제국의 2인자가 되는 과정을 에스더서는 증거합니다. 오늘은 79번째 광복절입니다. 안창호 선생은 수양 동우회 사건(1937년)으로 체포되어 경성 지방법원의 검사의 심문을 받습니다.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나는 일본이 무력만한 도덕력을 겸하여 갖기를…원한다.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기를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길 원한다. 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 될 것이다.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덕일 것이다. 내가 대한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동양의 평화와 일본의 복리까지도 위하는 것이다.” 안창호 선생의 강직한 태도는 투옥과 고문, 출옥 후 순국으로 이어집니다(1938). 그분의 신념 대로 사후 7년 만에 한국은 독립되나 한국민의 힘이 아닌 미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시편37:5,새번역)
요한복음 5:40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영어의 must, can, ought to를 심리학적(or 사회학적) 관점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 Must : 강한 의무나 필요성을 나타내며, 상대방은 “강제적 의무감= I must”을 갖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동의 여부를 떠나 행위를 강요당하므로, 인간의 실존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공산당에서 사람은 목표 달성의 수단일 뿐입니다. ② Can : 능력 or 가능성을 나타내어, “성취 능력 =I can”의 관점을 갖게 합니다. 자아실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고, 인생의 의미, 가치, 이웃 등은 차 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자아실현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는 빌 게이츠의 결혼생활은 깨졌습니다. ③ Ought to : 상대방은 권고를 듣자 책무를 깨닫고 책임감(책임의식)을 갖게 됨을 의미입니다. 인간의 삶은 “책임 의식 = I ought to”이라는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책임 의식’을 통해 외적인 가치 세계와 연관을 맺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려는 그 순간, 인간 존재의 주관적인 면이 보충됩니다. 이는 ‘의미, 가치’와 같은 객관적인 요소를 발견 혹은 수용하기 때문입니다”(프랭클, 의역함). 복음의 전파 방식이 그렇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나,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생명의 회개를 얻게 하고,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킵니다(책임감).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이유가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살았지, 하나님과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