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8:5절
“그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동물은 환경을 갖지만 인간은 세계를 갖는다”고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양심을 갖고 자유로운 결정과 이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기에, 마땅히 이런 인간상이 전제된 후 심리 치료에 임하도록 주장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이나 정신요법은 보이는 세계만을 대상으로 삼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두 세계의 창조주는 하나님이시며, 보이는 세계의 통치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본 시편은 광대한 우주와 수 많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책임을 연약한 인간에게 맡기신 경이를 노래합니다. 엄청난 영화요 존귀입니다만, 병들고 죽는 현실과 인간의 말을 듣는 피조물이 없음을 볼 때, 성취자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황제라도 바람과 바다를 복종시킬 수 없지만, 주 예수께서는 복종시키셨고(막4:41), 부활·승천하여 만유의 주님으로 임명받아 성취하고 계십니다(히2:6-9). 한편, 5절의 ‘하나님’이란 문구는 때때로 ‘천사들’로 번역되는데,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부활 이전의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이기에 천사들보다 조금 못합니다(시82:6,7), 그럼에도 우주만물의 관리자로 세워진 인간의 영화로운 지위는 존중되어야만 합니다. 젊고 건강할 때는 상관 없으나, 인간이 늙고 병들어 육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 관리자로서의 존엄성을 빼앗긴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로고테라피적 ‘의미 요법’의 강점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는데, 로고테라피가 미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
마가복음5:9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사람이 병들면 존엄성을 빼앗긴다” 이는 개인의 중요성을 생산적 유용성과 동일시하는 문화 때문입니다. 은퇴하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은 결국 자기 존중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또한, 범죄자들은 사회로부터 손상된 그의 존엄성을 반사회적 방식으로 인정 받으려 하고, 정신질환자는 스스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질 수 없어 자신을 향해 분노합니다. 사실상, 정신질환자는 인격의 통일성을 상실하여 내부에는 ‘군대’가 주둔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심한 갈등이 존재합니다. 한편, 성경이 말하는 거라사 광인은 악령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한 인격 억압이나, 정신질환은 병이나 죄 등 환자 내부의 요인에 기인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존엄성의 상실로 정신질환에 이른다면, 그 대처 방법은 환자의 존엄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따뜻한 말 한 마디도 치유를 가져옵니다. 좋은 예가 정신과 의사 설리반의 태도입니다. 담당 의사와 대화조차 완강히 거부하는 환자를 향해 의자를 좀 더 가까이 갖다 놓고 아주 친절하고 따뜻한 태도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면서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놀랍게도 환자는 마음을 열고 30분이 넘도록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설리반의 친근한 행동이 환자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피하는 악령들린 거라사의 광인을 주님은 어엿한 한 인격체로 대하심으로 그의 존엄성을 인정하셨다”(브루더)는 설명은 옳습니다. ‘존엄성을 가진 정상적인 인간’은 정신의학이 추구하는 목표이나, 이 이후는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상인들도 인생을 비출 가르침을 갈망하는데, 그것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마가복음5:19절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막5:19,새번역)
혹독한 나치 치하에서 2년 반 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풀려난 한 유다 청년(17세)은 탈무드를 공부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저주하였습니다. 프랭클은 그에게 “그 체험이 당신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었는지 누가 압니까? 그 체험 때문에 당신은 보다 정직하고 사려 깊은 인간이 되었소 2년 반 동안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적합한 임무를 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아마 당신의 수감 생활은 그 시기의 당신 인생에 꼭 알맞은 직무였을 것이오….탈무드에 대한 당신의 연구는 깊이 나아 가서 그 지혜의 깊숙한 곳까지 이를 것이오….사실 지금 당신은 마치 순도 높은 금은처럼 정련되어 있소…” 그 청년은 결정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청년의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여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비추어 자신의 곤경을 바라보게 해 주었습니다 : “나는 그 젊은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다. 환자의 서글픈 현재의 상태를 지적함이 아니라 그가 지금은 정신질환에 시달려도 그가 성취해야 할 의미를 섬광처럼 볼 수 있게 함으로 그렇게 하였다.” 귀신들이 쫓겨나가자 정상으로 돌아온 거라사 광인은 주님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주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가장 적합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2년 후 주님께서 데가볼리 지역으로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생명의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현실을 보게 합니다.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5:20)
잠언31:1-3절
“ 마싸 왕 르무엘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 아들아, 들어라. 내 속에서 나온 아들아, 들어라. 서원을 세우고 얻은 아들아, 들어라. 네 기력을 여자에게 쏟지 말아라. 임금도 그리 되면 망한다”(공동번역)
잠언은 3부로 편집되었는데, 제1부 1-9장은 강화와 설교 형식을, 제2부 10-29장은 경구와 속담 형식을, 제3부 30,31장은 부자 혹은 모자 간의 훈계 형식을 취하나 내용과 주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31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1-9절은 왕에게 여자와 술을 경계하고 공의로운 통치를 권면합니다; 10-31절은 현숙한 아내에 대한 찬가이며, 각 절의 첫문자는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른 답관체(踏冠體)- “머리를 밟아 가는 문체”- 입니다. 31장의 편집 의도는 분명합니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왕도, 어머니를 공경하고 그 바른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며, 현숙한 여인을 얻어야 합니다. 또한,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며, 삶과 행복의 안전망이고, 생명을 출산하고 태어난 생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기에, 현숙한 여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뜻인 ‘르므엘’ 왕은 솔로몬의 아명이거나 아니면 북아라비아의 지혜로 유명한 마싸의 왕이라 추정됩니다. 공동번역은 후자를 취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만약 전자로 취한다면, 1-3절의 여인에 대한 교훈은 솔로몬 왕의 삶을 반추하게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으나, 힘을 여자에게 쏟았고 현숙한 여인 대신 이방 여인들을 얻은 결과 우상숭배를 이스라엘에 도입합니다. 그의 사후 이스라엘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주님께서 주신다.”(잠언19:14,새번역)
잠언31:4,5절
“ 르무엘아,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은 일이 있다.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임금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독주를 좋아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적합한 일이 아니다. 술을 마시면 법을 잊어버리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판결을 불리하게 내릴까 두렵다.”(공동번역)
4∼7절은 술에 대한 경계로서, 이는 술이 왕의 공정한 직무 수행을 막는 측면과(4,5), 고통하는 사람이 먹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하는 용도(6,7) 때문입니다. “임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문자적으로 ‘왕들에게는 아니다’는 의미이며, 강조를 위해 이 표현을 두 번 반복합니다. 더 나아가 왕을 ‘통치자’로 지칭하면서 또 다시 ‘적합한 일이 아니다’라고 세 번째 반복함으로 어머니의 권면을 마음에 간직하게 합니다. 5절은 그 당시 왕의 직무 중 가장 중요한 재판을 르무엘에게 상기시킵니다.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어야 하나, 술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지면 오히려 그들의 생존권마저 빼앗아 버릴 우려 때문입니다. ‘법’이란 문자적으로 ‘제정된 것’이며, 국가를 다스리는 법규에 대한 표현입니다. 신명기17:18-19에는 왕이 모세 율법을 등사하여 평생 옆에 두고 읽으라고 규정합니다. 왕이 술을 가까이 하면, 이처럼 중요한 율법, 곧 신정 왕국인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가진 신자도 같습니다(벧전2:9). 신자가 술로 상징되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두면, ‘그리스도로 인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는 포도나무 가지가 될 것입니다(요15:6).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