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4: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5번 이혼하고, 지금은 한 남자와 동거하는 사마리아 여자는 성적 쾌락을 추구한 참담한 결과에 직면합니다. 그녀는 삶의 동반자가 될 남편이 없습니다. 즐거움은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 있는 위치를 지킬 때 자연스럽게 얻어집니다. 그런데 책임은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의 은밀한 도덕적인 문제를 지적하자, 갑자기 예배 장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바꾸어 버립니다. 종교적 토론은 흔히 개인적인 문제에 깊이 들어가기를 피하는 한 가지 방편이 되면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주제의 진부성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삶과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과 관련된 ‘어리석은 논쟁..율법에 관한 싸움”과 같은 무익한 일을 피하라고 명령합니다(딛3:9). 복음은 논쟁이 아니라 선한 열매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도덕한 사생활을 숨기려는 그녀를 보시자, 예배의 장소라는 새소재를 갖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제로 들어가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계명에 따른 삶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다시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온유하신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윤리적인 문제가 있으면 이웃 혹은 하나님과 참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자. 그러면 ‘영원한 생수(생명, 예배의 삶)’를 가질 수 있다.” 이는 부자 청년의 소유의 문제와도 같습니다. 다만, 사마리아 여인은 결단하여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생수를 얻었고, 부자 청년은 거부하고 떠남으로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요한복음4:29절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하갈은 술 광야로 도망 중 샘물 곁에서 주님의 사자를 만납니다(창16장). 그분은 이미 하갈의 신분과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여주인을 피하여 도망간다는 대답에,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이어 그분은 하갈 자손의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약속하신 주님과 같습니다. 하갈은 그분의 신성을 깨닫고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 살아계신 감찰자의 우물’이라 이름 짓습니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순종하여 돌아가서 아브라함 온 집에 자신의 경험을 전하였습니다. 2100년이 흘러, 하갈과 같이 잘못된 관계 때문에 고통당하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 곁에 왔다가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듣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시고 영원한 생수를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의 경우처럼 잘못된 관계를 시정토록 하십니다. 다만 이 경우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예배를 통한 온유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 여인은 하갈처럼 돌아가서 자신의 부끄러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으며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몰려 나왔습니다. 오직 죄인들만 예수께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은 쾌락의 길을 버리고, ‘영원한 샘물’의 말씀을 간직하면서 믿음으로 살았다고 생각됩니다. ‘영생토록 살아계신 분’을 만남으로 의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이것은 심리학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잠언30:29-31절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29-31절은 자신의 존엄성과 권위를 지켜 당당하게 살아가는 네 가지 표상이 제시됩니다. 초점은 네 번째 제시된 왕입니다. ‘잘 걸으며’란 ‘메티베 차아르’의 번역이며, ‘메티베’는 ‘즐겁다’ ‘잘하다’의 뜻으로 두려움 없이 기쁨을 가지고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입니다. 강조를 위해 ‘위풍 있게 다니다’의 구절을 반복시킵니다. 먼저 사자가 등장하며, 사자는 아굴의 시대에 팔레스틴에 서식하던 동물로서 최강자임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둘째는 사냥개로 번역된 ‘자르지르’인데 문자적으로는 ‘허리에 두른’이란 의미입니다. 빨리 달리도록 준비 된 상태로 보아(왕하4:29) ‘사냥개’ 혹은 ‘얼룩말’로 번역하거나, 아니면 당당하고 거침이 없는 수탉의 자태라고 보아 ‘수탉’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자와 같이 당당하게 다니는 동물임은 분명합니다. 셋째는 ‘숫염소’로 번역된 ‘타이쉬’로서, ‘타이쉬’는 ‘머리로 받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숫염소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전투 태세를 갖추고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당할 수 없는’의 원어는 ‘알르쿰 임모’이며, ‘백성들 앞에 선’ 혹은 ‘군대와 함께 한’을 뜻합니다. 따라서, 왕이 백성이나 군대와 함께 하고 있을 때의 당당한 모습입니다. 아굴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모습 중 한 면이라 하겠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시편37:3,새번역)
잠언30:32절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2, 33절은 30장의 결론이며, 교만과 죄악을 버리고 겸손과 경건을 취하라는 교훈입니다. ‘미련하여’의 원어는 ‘나발’이며 사무엘상 25장에 등장하는 갈멜의 어리석은 부자 ‘나발’이란 이름과 같습니다.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에 해당하는 ‘잠모타’는 단순히 ‘계획하다’는 뜻입니다. 어떤 계획인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 주체가 미련한 자여서 ‘악한 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입을 막으라’는 것은 죄악을 뉘우치고 그 악한 말을 자제하라는 뜻입니다. 갈멜의 부자 ‘나발’은 자신을 위해서는 “왕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였지만”,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전령들에게는 “다윗은 누구이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라고 다윗의 처지를 비웃고는, “내 떡과 물과 고기를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는가”라는 악한 말과 함께 빈 손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동안 나발의 양 떼를 지켜 준 선행에 대한 보답은커녕 오히려 모욕을 당한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발은 부를 일구었으나 인색하고 성공에 도취되어, 다윗을 과소평가했고, ‘다윗이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신탁도 무시하였습니다. 미련한 자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늘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지혜자이며, 교만과 미련한 짓을 깨달으면 즉시 돌이켜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는 본절의 제자이며, 교만과 악한 생각을 돌이키지 않는 자는 바보로서 그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잠언30:33절
“(왜냐하면)우유를 저으면 굳은 우유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우면 분쟁이 일어난다.”(새번역)
33절의 시작은 접속사 ‘키’로서, ‘입을 막으라’는 권면(32절)의 타당성을 말합니다. ‘저으면’ ‘비틀면’ ‘돋우면’으로 각 번역된 원어는 ‘미츠’입니다. ‘미츠’는 ‘누름’ ‘비틀어 짬’ ‘억압’ 등을 뜻하는 낱말로 우유가 가득한 가죽부대를 삼각대에 걸어놓고 비틀어서 버터를 만드는 풍습에서 나왔습니다. 아굴은 ‘미츠’를 세 번 반복하는데 행동이 가져올 필연적 결과를 가르치는 의도입니다. 즉, 우유를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오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교만한 태도나 악한 말은 사람을 격동시키고, 이어 다툼(분쟁)을 일으킵니다. 이 피할 수 없는 귀결을 차단할 수 있는 비법이 32절에서 언급된 권면입니다. 즉 자신만을 주장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아굴의 권면을 받아들일 것이나 교만한 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굴이 교훈을 마치면서 겸손과 절제를 강조한 것은 이 자세가 지혜로운 삶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입을 절제하지 못하면 쓸데 없는 말을 하여 상처를 줍니다. 결과는 미움과 분쟁이며, 물고 뜯고 하여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 사람은 본성이 악하여 입을 열면 남은 낮추고, 자신은 높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입을 열면 ‘은혜’를 끼쳐야 할 것입니다. 벽돌로 건물을 쌓듯이, 상대방의 삶을 세워주려는 사랑과 지혜(잠언)는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겸손히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