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7/15-19)


잠언30: 26절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본문은 지혜로운 두 번째 동물을 소개합니다. ‘사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쉐판님’이며, 팔레스틴이란 배경을 놓고 보면, ‘시리아 바위너구리’ 즉, 작은 토끼 크기이지만 귀와 다리가 짦은 담황갈색의 작은 포유동물을 지칭합니다. ‘바위 사이에’란 험한 바위산, 혹은 낭떠러지를 의미하며, 이는 바위 너구리가 천적이나 인간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높거나 험한 바위틈새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또 바위 너구리는 군집동물로서, 보초가 위험신호를 보내면 재빠르게 바위틈으로 숨어버린다고 합니다. 실로 바위는 이들의 은신처입니다. 그 모습을 본 시편기자는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104:18)고 노래합니다. 아굴이나 시편기자가 바위너구리에 주목을 하는 이유는, 연약한 이 동물은 자신을 지킬 방어수단이 없음을 깨닫고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안전을 도모하는 지혜를 갖춘 점입니다. 인간 역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환난날에 피할 큰 바위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들이 배우거나 행할 수 없는 지혜로써, 오직 자신의 약함을 깨닫고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뜻 즉, 선을 행하려는 신자만이 가능합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엔게디 광야로 도망을 갔고, 부하 600명과 함께 바위로 만들어진 동굴에 숨곤 하였습니다. 바위 너구리와 비슷하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사 사울의 손에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굴에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 다윗은 옷자락만 베고 살려줍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랑입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다.”(시편94:22,새번역)

잠언30:27절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약한 개미와 사반(바위너구리)과 달리, 메뚜기의 약점은 ‘임금(지도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도자가 없으므로, 구성원들 각자의 생각대로 살기 마련이고 혼란과 무질서가 극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굴이 본 메뚜기 떼는 놀라운 질서를 유지합니다. ‘나아간다’는 동사의 원어는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나아가다, 행진하다”(민1:20)를 뜻합니다. ‘떼를 지어’는 여러 무리로 나뉘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함으로, 이를 정확히 번역하면,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분대별로 행진해 나아간다”입니다. 메뚜기 떼들이 각 부대별로 행진하는 군대와 같이 단 한 마리의 예외나 이탈 없이 무리를 이루어 질서 정연하게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메뚜기들에게는 ‘임금’이 없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도자 없이도 공동 목표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살아가는데, 하물며 지도자가 있어도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아 공동체에 큰 피해를 주는 자는 미물만도 못한 자입니다. 사사기의 사건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열두 지파는 왕이 없어서 자신의 소견대로 살아갔습니다(삿21:25). 그 시대 초기에 기브아 땅을 지나가던 레위 사람은 그의 첩이 집단으로 능욕받아 죽었습니다. 회개를 모르는 베냐민 지파는 정의를 수호하려는 11지파와 전쟁을 벌여 처참하게 몰락합니다(삿19-21장). 사회에는 현명한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출산 문제와, 이에 따른 교육개혁, 노동개혁, 연금개혁, 그리고 외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8절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마지막으로 아굴은 도마뱀을 작지만 지혜로운 동물로 손꼽습니다. 도마뱀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이빨이나 독과 같은 무기 없이, 왕궁에서 버젓이 살아갑니다. 작고 약하나 지혜로운 도마뱀이 왕궁에 거처를 둔 것처럼, 신자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존엄한 삶이란, 그들의 동기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요, 수단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며, 구체적인 행동양식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삶”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성결하며, 화평하며, 관용하며, 이성에 열려 있으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차 있고, 거짓과 편견이 없습니다(약3:17). 그들의 자원은 모든 것의 주님과, 그분의 거듭된 약속 –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다 행하겠다”- 입니다(요14:13,14). 다만, 제자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대사이기에 세상은 그들의 메시지를 두려워 하나,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칼은 없습니다. 박해는 필연입니다! 따라서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억울하게 매맞고 감옥에 갇힌 그 밤,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고마워 찬송을 부릅니다. 이른바 ‘밤의 노래’를 드리자 옥터가 흔들리고 간수와 그 가족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아침에 관리들은 그들을 방면하려고 하나, 바울은 로마 시민임을 밝혀 관리들이 친히 와서 배웅토록 합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아무도 경시하지 못하도록 의도한 조치입니다. 마치 왕궁에 사는 도마뱀의 지혜를 보는 것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요한복음 4: 16절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란 나찌의 강제수용소의 경험이 근간이 됩니다. 사람은 삶의 의미를 확고히 파악하고 있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견디어 낸다는 믿음에서 출발하는데, 극한의 상황에서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삶에서도 작동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연로한 의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서 두 해 동안 깊은 절망에 빠져 살았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그분의 아내가 지금 그가 겪는 이 지독한 고통을 모면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자, 그 의사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프랭클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의 비탄은 희생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자 절망은 사라졌다.” 실로 수명은 삶의 의미를 강렬하게 느낄 때에 연장됩니다. 어느 영문학과 교수로 은퇴하셨던 분은 90 고령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미를 잃고 곡기를 끊셨으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신 사례가 있습니다. 의미 추구를 포기하면 삶의 공허가 생겨나고, 이 공허는 식욕, 성욕, 지위나 권력에 대한 욕구 충족 등과 같은 이차적 목표가 전면에 나서도록 합니다. 즉, 마음의 빈 자리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시도하는 중에 인간에게 어울리지 않는 목표들이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바로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로버트 레슬리 목사는 빅터 프랭클이 주장하는 ‘실존적 공허 existential vacuum’의 관점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를 풀어가나, 복음은 진리이며 영원을 포함하기에 더 적절합니다. 내일 살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편4:7)

요한복음4:13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존재감 상실, 즉 「실존적 공허」는 병리학적 의미에서 병(곧 비정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질병과는 다른 ‘삶의 조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때 종교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는 경우가 많습니다(전3:11).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영적차원을 본능에서 파생되는 부산물로 여겨 심리요법에만  치중한다면, 근원적인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프랭클의 어떤 환자는 정신과 의사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을 이해 못하고 은근히 비웃는 태도에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의 ‘의미요법’에서 의미를 주는 대상에는 종교가 포함됩니다. 종교는 인간 존재에 큰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을 보고 마을 아낙네들과 대인 관계가 심히 결렬되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여인의 삶을 결정한 원인을 어린 시절의 환경이나 힘든 경제적·사회적 요인 탓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개인의 책임감 있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자유는 조건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대한 자유이지, 조건들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빅터 프랭클) 말 같이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는 성적 부도덕이었습니다. 그녀는 성적 쾌락을 통하여 행복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이제 여기서 돌아서서 올바른 삶과 참된 관계로 나아가야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점을 온유하게 지적하시면서 참된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참된 관계를 맺으라고 가르치십니다.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