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묵상(2024/7/1-5)

시편37:11절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바른 성서적 세계관을 통해, 페르샤 제국이 이스라엘 징계의 도구임을 깨달은 느헤미야는 제국의 수도 수산에서 왕의 신뢰를 받는 술관원이 됩니다. 비록 페르샤의 정책이 이방인에게 관대하였지만, 수산 궁에서 왕의 측근이 된 사실은 그의 성품, 실력 등을 짐작하고 남게 합니다. 성경에는 술관원에 대한 언급이 서너 군데서 나옵니다. “당시 왕의 술 관원은 왕이 마시는 술을 비롯 왕의 음식을 맛보는 일과 왕의 침실을 맡아 보는 일, 그리고 경호하는 일까지 하기도 했다. 그들은 술을 선별하고 술잔을 올리고 독이 들었는지를 입증하기 위해 먼저 맛보았던 것은 물론, 유쾌하고 재치있는 왕의 친구였다. 따라서 직분상 왕의 최측근이며, 왕의 행정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래서 술 관원이 군사지휘관인 총사령관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동생 하나니로부터 우연히 예루살렘의 사정을 알게 되자, 자신이 가서 그 성과 거기 유하는 동포들을 위해 성벽을 중건하려는 생각을 갖고 기도하였습니다. 왕과 좋은 친구로 지내는 당대의 권력자 느헤미야가 1,400km 떨어진 변방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가려는 생각 자체가 소명입니다.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소명을 갖고 있기에,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행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사라지나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들은 영원히 남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벽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성벽 중건을 단행하였다는, 주님을 사랑한 느헤미야의 이야기는 남아 있습니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요일:2:17,공동번역)

마가복음 10:15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공관복음서에서 전부 언급하는 관리이자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이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어갈 만큼 가치가 있는 삶을 모색하던 중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달려 온 것입니다. 지금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장을 얻었고, 가정도 꽤나 안정되게 꾸려나가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신망을 받는 지위에 올라 섰지만, 바로 이 시점에서 자신의 삶이 도대체 무엇이며 삶은 무슨 가치를 지니는가를 묻는 것이 장년층 젊은이들의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칼 융은 일찍이 그러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은 ‘옴짝달싹도 못하겠다’라는 말로 표현된 느낌을 갖는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진정한 사명감을 상실하게 되면 부와 권력을 갖더라도 삶은 공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청년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예수님의 하신 첫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청년은 회당에 나가고 십일조를 바치며 성경을 읽는 것과 같은 예배 행위들이나,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는 윤리 행위들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그 대답으로 찾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훨씬 더 근본적인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주의’입니다. 십계명 역시 하나님 중심의 삶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 청년은 계명에 초점이 있었지 그 계명을 주신 분과의 관계가 미흡하였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막10:19)

마가복음10:20절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는 청년에게 주님은 윤리 행위의 기준들, 즉,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사취 등의 금지와 부모 공경”(막10:19)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긍극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삶,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본질에 놓여 있는 것이지 단순히 개개 규범의 준수여부가 그 핵심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이웃에게 실천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청년은 십계명을 잘 알고 있었고 나름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하나님 중심의 삶에 대한 분명한 의식은 결여되었습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막10:21a). ‘사랑’은 도움을 주는 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자체나 인간관계에서의 변화는 사랑받고 있음을 깨달을 때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젊은 부인의 말입니다. ”남편은 내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가정을 잘 돌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집안이 깔끔한 것과는 상관없이 그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나에게 생길 때에 비로서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남편에게 알려 줄 수 있을까요?” 영생은 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계명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어진 말씀은 재물을 사랑하는 그의 존재를 흔들고 그를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10:21b)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1-23절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네 가지 행태(범죄)를 , 지진과 같은 물리적 격변에 빗대어 표현합니다. 공통점은 무자격자가 합당하지 않은 지위를 차지한 것입니다. 먼저, ‘종이 임금된 것”에서, ‘종’이란 노비라기 보다는 자율적 행동을 할 수 있는 권세 있는 신하로서, 그는 기회를 엿보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의 자리에 앉습니다. 당연히 국가와 사회의 질서가 격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예가 200년을 존속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군대장관들입니다. 이들에 의해 9번이나 정변이 일어났고, 9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였습니다. BC722년 앗시리아 제국은 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유브라데 강 너머로 흩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사에는 이런 반역이나 혁명 사건이 빈번하였는데, 평화적인 권력 교체 제도가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는 국민 투표를 통한 통치권력의 교체를 제도화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대한민국도 그중 하나입니다. 또, 중국 공산당 독재가 보여주듯이, 가격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시장경제는 사상, 정보 그리고 물건의 흐름이 자유로운 민주주의 체제에 잘 어울리는 경제질서입니다. 한국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습니다. 이는 2차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들 중 유일한 경우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왕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경건하고 품위 있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딤전2:2,새번역)

잠언30:21-23절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두번 째 유형은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입니다. ‘미련한 자’란, ‘어리석은’ ‘무감각한’ ‘분별 없는’을 뜻하는 히브리어 ‘나발’의 번역이며, 단순한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신32:6). ‘배부른’의 원어 ‘이세바으 라헴’을 직역하면 ‘떡으로 만족하다’이며, 여기서는 ‘재물의 풍성’을 나타냅니다. 지혜롭고 부지런한 자가 부를 얻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어야 사회는 안정되고 번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분별 없는 악한 자가 많은 재물을 얻어 풍족하게 되면 사회 질서는 크게 흔들립니다. 사회 질서가 흔들리면, 게으르고 악한 자들은 더욱 교만· 방탕하게 되고, 지혜롭고 정직한 방법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보려는 많은 이들은 낙담하여 도덕성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도덕이 결여된 사회는 범죄로 들끓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다윗이 피신하던 시절 갈멜의 거부 ‘나발’은 다윗이 양떼를 지켜주었지만 오히려 멸시하였습니다. 분노한 다윗이 그를 죽이려고 올라갈 때 아비가일의 영접을 받고 뜻을 돌이켰습니다. 나발 한 명을 제거한다고 악한 인간 본성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과 주님의 모범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계명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절실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롬8:14,새번역)